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게이의 욕망 따위가 뭐라고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3

by 선우비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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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본 적 없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 따위 알지 못하니까


그때부터 ‘그것’이 시작됐다.

그날 이후 내 상태는 이랬다.

밝게 웃고 떠들다가도 갑자기 심장 부근이 시큰해지면 눈두덩이가 짓무를 때까지 울었다.

길을 가다 전광판에 아름다운 유럽 도시 사진을 배경으로 한 광고가 나온다던가, 채널을 돌렸는데 영국 프리미어리그 경기방송을 하고 있다던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샹송이 흘러나온다던가, 이렇게 방아쇠를 당기면 백발백중이었다.

한마디로 유럽 노이로제에 걸린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안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울어서 눈에 염증이 생겼다.

옆 건물에 있던 정신과를 발견한 건 세 달 동안의 염증치료가 끝날 무렵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 애와 주고받은 말들은 순전히 흥분을 목적으로 지어낸 것이지 조금의 진심도 담겨있지 않다고 했다.

욕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깊은 감정을 나에게 느끼기 때문에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했다.

원한다면 양쪽 가족들에게 다 알리고, 진짜 부부로 인정받으며 살겠다고 했다.


“그 애는?”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애인에게 들켜서 괴롭다, 헤어지자고 톡을 했다.

상대의 대답은 “뭐, 그러던가. 그동안 고마웠어요. 애인에게 잘해.”였다.


“요즘 애들 쿨하네.”


난 피식 웃으며 그가 상대번호를 차단하는 걸 보았다.


왜 바람 폈어? 나랑 사는 게 지겨웠어?

묻지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떤 말들이 나올지 뻔했고, 그 말들을 믿지 않을 게 뻔했고, 그의 말 저편에 숨어있는 진짜 이유들을 추측해내느라 쓰러질 때까지 울 게 뻔했다.

난 어땠지? 그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시선 한번 돌린 적 없이 살아왔던가?

그럴 리가 없다. 내 컴퓨터에는 내 취향의 남자들이 나오는 야동이 비번 걸린 폴더 안에서 편안하게 서식하는 중이다. 지나가다 멋진 남자가 보이면 절로 눈이 돌아간다. 내 자위 속 상상의 남자는 그가 아니다.


"아니야. 달라. 상상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 사이는 태평양 보다 넓다고. 사람을 죽인다는 상상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전혀 다른 범주야."


그래, 그렇지.

알아, 안다.

그런데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게이의 욕망 따위가 뭐라고.

게이 주제에 일부일처를 한다고 누가 상이라도 준다고.

이성애자 가족 놀이에 참여하지 않아 삶이 편안하고 즐겁다고 떠들어댄 주제에, 부부의 정절은 믿고 따르고 싶다고?
부부가 정절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낳을, 그들이 많은 희생을 해가며 정성스럽게 키워낼 자식 때문이야. 완벽하고 순수하게 내 자식이어야 하기 때문에.

애도 낳지 않고 기르지 않을 게이에게 정절은 무슨!


가족들이 보기에 우리는 주례 선생님을 위시한 대중들 앞에 서서 순결서약을 하지 않았기에, 국가가 보기에 우리는 법률상 부부가 아니기에,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우리는 더러운 호모새끼들이기에, 우리는 그저 존재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바람피운 것은 사실 큰 죄도 아니다.

심지어, 그의 말에 따르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지은 죄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 정도다.

그깟 거짓말 정도로 헤어진다고?

누가 알아준다고? 누가 칭찬해 준다고?

용서?

그런데, 용서 같은 거 할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싶다.

나야말로 내 인생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펑펑 울면서 이야기할 사람 하나 만들지 못한 어리석은 인생아.

네이트 판에 올라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 똑같다.

처음엔 상대에 대한 분노로 잠 못 들지만, 나중엔 스스로가 미워져 이불킥을 하게 된다고.

멍청하게 살아온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후회 돼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래, 이건 사필귀정인 거다.

나란 인간, 거짓이란 붓으로 행복을 그려왔다.

거짓말쟁이로 살아왔고, 그 이득을 다 누렸으니, 이건 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거다.


용서를 바라는 그에게는 어떻게 응해야 할까.

그래, 거짓을 참회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선사해야겠지. 재발방지를 선언하면서 통곡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게 더 힘들다.

이제부터라도 솔직하게 살아가자, 그럴까?

그의 말처럼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고, 죽으면 재산을 내 앞으로 돌리겠다 선언하는 유언장인지 뭔지를 쓰면 되는 걸까?

그러면 그는 더 이상 바람을 피우지 않고, 우리 사랑은 견고해지고 강해질까?

100세 시대란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내야 하는데, 그런 서류들이 우리의 사랑을 지탱해주는 벽돌의 전부일까?

그런 것들이 아니면 서로에게 충실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해온 걸까?

남들의 인정, 각종 서류들... 그것들을 기본적으로 누리고 사는 이성애자들도 결혼한 세 쌍 가운데 한 쌍은 반드시 이혼한다는데.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냐고?

몰라, 그 딴 거.

나에게 묻지 마,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 따위 알지 못하니까.

도서관 어디를 뒤져봐도,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신문사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져도, 바람 난 게이 커플이 서로의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잘 살아가는 방법 따위는 나오지 않으니까.

당신 스스로 찾아봐.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둘 거야.

우리 관계, 어떻게 흘러갈지 그냥 두고 보려고.

당신도 항상 말했잖아.


“인생, 가만 보면 결국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


우리 집 가훈이잖아.

그 대가가 시도 때도 없이 시작되는 ‘그것’이라면, 당분간은 어리석게 살아온 내가 감당해야 할 형벌 같은 거라 여기기로 했다.

충분히 아파하다 보면 언젠가는 멋진 해법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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