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서조차 누군가를 의식하는 인생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4

by 선우비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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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전부 잔소리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어학원은 알아봤어?”


아니.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진 않는다.


“막 알아보려고 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빨리 알아봐. 그리고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가고 싶은데, 괜찮아?”


애들이라면 연구실에 함께 있는 대학원생들을 말한다.

싫어. 벌써 회도 사다 놨단 말이야. 더구나 재민이에게 회 먹으러 오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진 않는다.


“회 3만 원어치 사다 놨는데, 그럼 더 사다 놓을까?”


지금으로선 유일한 돈줄이니, 그의 학교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애들 무지하게 먹으니까 무조건 돼지고기로 해. 회는 애피타이저.”


“알았어.”


“저녁때 보자.”


다시 장을 보러 가야 되는구나.

아, 사실 귀찮아. 귀찮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은 대부분 게이다. 커플모임 회원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게이스럽게 집을 장식해 둔다.

커플 사진을 군데군데 배치하고, 외국에서 산 야한 게이 그림책도 손에 잡히는 곳에 두고 읽는다.

그러다 이번처럼 집에 ‘이성애자 손님’이 오면 일단 그것들부터 치워야 한다.

너무 살림 냄새가 가득한 풍경도 좋지 않다.

좀 과하다 싶은 장식은 모두 떼어내고 침대엔 하나의 베개만 놓아둔다.

거의 창고처럼 사용하는 방에 이불을 깔아 두고 내가 쓰는 방처럼 꾸미는 일도 필수다.

전체적인 집안 분위기를 중년 아저씨 둘이 궁색 맞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예전에 온 대학원생 하나가 급하게 컴퓨터를 써야 한다고 해서 빌려줬는데, 그 안에 야한 동영상이 하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옆에 서서 계속 식은땀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학생들이 온다고 하면 컴퓨터도 확실하게 점검한다.


학생들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교수의 사촌 동생이라고 둘러댔었다.

직업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나이들이라 이 나이에 푼돈 받고 아르바이트하면서 먹고 산다고 말하면 대번에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뭐 어때? 애들은 그런 거 신경도 안 쓸걸?”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지만 당사자인 나는 그렇지 않다.


“그래도 싫어. 아르바이트하는 사십 대 중반의 사촌 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는 지도교수, 수상한 상상력을 자극하잖아. 요즘 애들은 그런 거 귀신 같이 알아챈단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다.

이럴 때마다 후회한다.

회사 그만두지 말걸.

그랬다면 동거도 없었을 거야,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래도 종종 상상해 본다.

계속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는 내 모습을.

내가 이루었을,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멋진) 또 다른 삶의 모습을.


“애들이 가장 관심 없어하는 직종이 뭐지?”


“공대 애들이니까... 뭐, 인문대 쪽이려나?”


그래서 프리랜서로 교정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기에 플러스, 컴퓨터로 그림도 좀 그리고.

어려운 영어로 된 직업을 말하면 애들은 뭔지도 모르고 와~ 한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들이 모를만한 직업을 지어낸다.

출판 쪽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게임업계 사람이 되는 식으로.

“그렇다면 두 분 사이는 뭐죠?”라는 질문을 유도할 “전업주부입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거 귀찮지 않아요?”


쏘리, 회는 담에 같이 먹자, 집도 치워야 하고 지금부터 할 일이 태산이야, 투덜투덜 상황설명을 늘어놨더니 재민이 물었다.


“그냥 평소에도 치워두면 되잖아요. 언제 누가 찾아와도 문제없도록.”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박스에 담아서 벽장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래, 알아. 그 방법,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니야.

그냥 너무너무너무 싫은 거야.

평소에도 다른 사람이 사는 집처럼 꾸며놓고 살아야 하는 삶이.

내 집에서조차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그렇게까지 해버리면 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돼버리니까.


“학생들은 형의 존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촌이라고 둘러댔어. 다행히 우리가 성은 같으니까.”


“아, 생각만 해도 귀찮다. 계속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귀찮아, 아주 귀찮아. 한 번은 애들에게 고기 구워주다가 습관적으로 자기야 냉장고에서 고기 더 가지고 와,라고 했다가 깜짝 놀라서는 순간적으로 고기집게로 학생 하나를 가리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지.”


“조마조마하네요.”


응, 사는 게 좀 그래.

조마조마하고 귀찮고.

너네는 이제 겨우 동거 5년 차지?

너도 이제 슬슬 알게 될 거야.

좋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이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전부 잔소리일 뿐이니까.

내가 그러했듯이.


끝.


작가의 말:

「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는 예전에 『계간 문학들 52호』에 게재했던 「거짓 주부」를 수정, 보완한 작품입니다.

제목을 거짓 주부라고 지었던 이유는, 법학자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이란 저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시노 교수에 따르면,

“커버링이란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으로,

눈에 띄지 말고 사회에 매끄럽게 동화(同化)되어 살아가라는 압박에 따르는 행위입니다.

동성애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난 딱히 동성애 반대하진 않지만 내 눈엔 안 띄었으면 좋겠어. 자기들끼리 숨어 살았으면.”

하는 사람들도 꽤 많죠?

차별은 반대하지만, 차이의 표현은 자제하라는 주류의 요구는 소수자의 삶을 다양한 거짓(커버링)으로 물들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함께 십 년을 붙어있어도 주변에서 게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이성애자 커버링이 완벽한 커플입니다.

연인임을 숨기기 위해 해 왔던 여러 억지스러운 일들을 ‘요령 있게 살아가는 처세술’로 속이며 살아가고 있죠.

하지만 거짓이 뿜어내는 마이너스 기운은 상당해서, 거짓은 결국 불행을 불러옵니다.

사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나를 비롯해 주위의 게이 커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점철된 자신을 긍정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더 안쓰럽게 느껴지고도 했네요.

현실의 많은 게이 커플들이 부디 소설의 결말과는 다른, 더욱더 좋은 해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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