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Oct 17. 2021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

내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는 ‘일본어’였다. 수능을 대비한 입시 위주의 교육 방침 속에서 시험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은 제쳐두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난생처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많이 신기했었다. 어쩌면 ‘영어’에 이미 힘들어하고 있었을 그때, 아예 생판 처음인 언어를 다 같이 동일선 상에서 배운다면 나도 좀 해볼 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무모한 기대는 무참히 박살 났다. 난 그냥 ‘언어 학습 능력’이 없거나 매우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은 국어는 나쁘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 건지 불편하지 않게 살아왔다. 나만 안 불편하고 주변은 불편했을지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일본어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번호를 불러서 한 명을 일으켜 세웠는데, 불행히도 그게 나였다. 그리고는 뭐라고 뭐라고 일본어로 질문을 하셨다. 당연히 나는 못 알아 들었고,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이이에(아니요)’라고 말했다. 질문이니 예, 아니오로 하면 될 것이라는 내 나름의 꼼수였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 전체가 웃음바다에 빠졌다. 그래도 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듣지 못했으니 웃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알고 보니 선생님의 질문은 ‘오나마에와 난데 스카(이름이 무엇입니까)?’ 였던 것이다. 이름이 무엇(What)이냐고 묻는 질문에 아니요(No)라고 대답했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한 동안 내 이름은 ‘이이에’가 되었다. 내 이름을 스스로 ‘이이에’라고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씁쓸한 추억을 뒤로한 채,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일본어’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필요와 재능이 없었고, 외국어를 본다면 차라리 영어를 한 글자라도 더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라고 했지만 일본어에 단단히 삐진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좀 살아보면서 참 신기한 게 있다. 일본과의 첫 만남이었던 이 ‘일본어’와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음에도 ‘일본’이라는, 정확히 말하면 ‘일본 문화’라는 것이 내겐 많이 친근해져 있었다. 그게 고등학교 시절 ‘일본어’ 수업 때문인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일본 콘텐츠’ 때문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 역사를 좋아하는 내가 국사와 관련된 일본 역사에도 관심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나라를 대하는 일본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은 마음속 깊이 그들을 지탄한다.) 이런 일본에 대한 친숙함과 호기심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발 더 다가서기도 했었다. 연애시절 와이프와 종로 일본어 학원을 다니기도 해 보고,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오키나와,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그 닮았지만 무언가 다른 것들을 체험하는 그 경험이 흥미로웠다. 속으로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뻗어나간 민족이라고 믿는 내 견해도 한몫했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 역사에 관련된 만화, 책, 게임, 영화 등에 시선을 종종 빼앗긴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예야스’ 이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들에는 항상 멈추게 된다. 아직 본격적으로 파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우선순위가 아주 높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늘 한 번씩 눈길이 간다. 이 책도 그렇게 우연히 회사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주제와 설정이 아주 독특하다. ‘에도’라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스토리 텔링을 통해 지루할 틈 없이 전한다. 이는 소재도 소재지만 아마 작가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나처럼 엄청 빠지지는 않았지만 늘 일정 수준의 관심이 있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일본 역사 특유의 군신 관계, 야망, 얽혀있는 인간관계 등이 잘 녹아져 있다. 가볍게 읽어보면 당신의 호기심을 어느 정도 채워주지 않을까 싶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일본어’를 배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내 고등학교 트라우마 때문일지, 그냥 내 언어적 능력의 부족함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좋아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치 ‘나'와 '일본어'처럼 말이다. 그래도 ‘일본’을 하나의 문화로서, 역사로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당히 즐기려고 한다. 그냥 내 멋대로의 잣대와 기준일 지 모르겠지만, 저지른 잘못과 행동으로 그것의 모든 것이 부정된다면 우리 스스로를 포함해서 남는 것이 있을까 싶다.



읽고 남는 건 받은 질문과 했던 고민뿐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





 브런치는 이런 곳입니다.

이 작가와 책을 만나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아는 것을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