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바닥까지 내려간 한 주다.
큰 조직을 이끄는 멋진 (아니꼬울 때에는 잘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일하면서 간혹 느끼는 일종의 파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의 어느 한 우물 속에 살던 개구리가 우물 밖에 나와 청계천 어딘가의 개울에 살다가, 한강변으로 나온 지난 2-3년간 이런 감정의 파도가 종종 찾아온다.
나도 나름 청계천에서 카리스마 있는 잘나가던 리더였는데 말이야, 왜 이렇게 쭈구리가 된건지. 다들 어찌나 할 말도 많고 말도 청산유수로 잘하는지 도무지 나는 따라갈 재간이 없다. 청계천의 군계일학이었던 개척자(pioneer)는 한강에 와서 그저 사람 좋고 일 잘하는 그 누군가가 되었다. 뱀 머리가 용의 꼬리가 됬을 때 오는 문화충격으로, 더 큰 바다로 나갈 용기는 잃은지 오래다.
누가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지만 이렇게 바닥을 치는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래 나 없이 다들 잘 살아보라고 흥칫뿡 하며 일을 놓으면 좋으련만, 내 존재감을 이렇게라도 세워야겠다며 더 열심히 일해서 감정을 지운다. 그런다 한들 나는 그 자리 그대로이지만, 불행하게도 "회복탄력성(resillience)"이 심하게 좋은 내 멘탈은 조삼모사인지 금새 회복되어 (이번엔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에 매진한다.
앗, 365일 열근모드가 된 워커홀릭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군.
더 충격적인 비밀을 알아냈다.
그래도 군계일학으로 인정 받았다고 회고되는 그 10년 전에도 내 감정의 폭은 동일했다.
쟁쟁한 스펙으로 무장된 동기들 속에서 운 좋은 빈털털이인 귀엽고 순진무구한 나는 늘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일을 성실히 열심히 해서 부족한 점을 채워서 버텨야 겠다며 회사에 20대를 바쳤다. 주니어 때에는 열심히 야근하고 약간의 창의력과 리더쉽을 발휘해서 맡은 일을 군말 없이 해내면, 똑똑한 리더들은 금방 알아보고 서로 데려가려고 러브콜을 보냈다. 그러니 나름 군계일학이었다고 하자. 덕분에 한국에서 해외지사로 나갈 기회도 얻어 시니어로서의 경험을 쌓고, 이제 한강변까지 나온 것이다. 000 회사의 직원으로서 외부에서 보여지는 화려함과 달리, 10년전이나, 5년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 뿐이다. 언제쯤 나는 내 모습에 만족스럽고 당당해질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일하는 모습이 때로 너무 멋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더 멋있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그럴 깜냥이 안되는 내 자신에 화가 나고 답답한 것일테다. 우물에서 온 인재를 못알아봐주는 환경도 원망스럽고, 내가 사실은 좀 샤이해서 그렇지 사실은 깜냥이 엄청나게 된다고 스스로를 고급지게 포지셔닝 하고 셀링하지 못하는 내 모습도 멍청해보이고 말이다. 남들 안 보이는 곳에서 밤새 벼락치기로 열공해서 샥 환골탈태해 어느날 갑자기 리더 포스를 뿜뿜 내고 싶은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 전체를 바꿔야 하는 일이라 답이 안보인다.
내가 올 수 있는 커리어 래더의 끝은 여기인가. 이제 수평이동을 전전해야 하나.
지금 이 심연의 시기를 지나.. 앞으로 5년 후 그 어느 자리에 있든 나는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겠지.
이렇게 에너지 레벨이 한없이 낮아질 때면,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거다.
피아노를 치고.. 책을 보고.. K-drama에 송중기와 현빈에 넋을 잃고..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확실히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 맞군. (인생의 반나절은 내가 외향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회사를 고집하고 권력과 조직을 탐하는지. 묘하다.
가끔은 고민이 된다.
이렇게 울지 말고 내 playground를 바꾸어 봐야 하는걸까.
그래도 내가 좀더 승산이 있는 그 자리, 우물 속으로 돌아가 골목대장이라도 도전 해보고 싶다.
아니면 한강 변에 서성이며 버티다보면 환골탈태한 내 모습을 어느 날 발견할 수 있는 행운이 있을까.
하긴 지난 10년전의 어리숙한 내 모습에 비추어 지금의 나를 보면 완전 다른 사람이니까. 인생 대역전 수준.
그래서 스피치 전문가를 만나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영어지만, 일단 모국어라도 말만 들어도 높은 사람 같이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와 제스처, 그리고 논리적이고 영감을 주는 말하기를 전문가에게 배워보자며.. 솔직히 이런게 배워서 되는건지 반신반의하다. 체험 후 후기를 기대해주시라.
P.S.
주제에 벗어난 여담이지만, 이런 스피치 코칭은 가격이 꾀 비싸다. 시간당 기본 5-10만원은 가는 듯 하다. 4-5차례 정도 생각하니.. 비.싸.다. 이런 training은 회사에서 내줘야 제맛인데 내 지갑을 열려니 후덜덜하더라. 그러다 문득, 우리 딸래미 수영코치는 45분에 7만원, 미술놀이에 4만원을 받아가는데 아깝다고 느낀 적이 없더랬다. 내가 열심히 번 돈인데, 나한테 투자하는데 인색해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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