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사유하다> 7화
중2병도 사춘기도 없이 고분고분했던 그 애는 사라졌다. 어른이 된 딸은 허락도 없이 맘대로 휴학하고선 오히려 나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며 나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엄마,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와 꼭 풀고 싶은 게 있어요”
나도 내 아버지와 꼭 풀고 싶은 게 있다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은지야~세상에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살 수는 없어”
전쟁을 본 아버지를, 올림픽을 본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듯이, 21세기에 태어난 딸도 나를 쉽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 나 그리고 내 딸 은지는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 사람이지만,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꼭 풀고 싶어요. 그걸 풀지 못하면 점점 엄마와 멀어질 거 같아요”
그녀가 마음 안에서 오랫동안 발효시킨 그 응어리가 뭔지 알 것 같다. 나도 내 아버지와 꼭 풀고 싶은 게 있다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녀를 힘들게 한 세 가지
“어머니! 해봐. 어머니!”
딸이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눈만 겨우 뜨던 핏덩이 때부터 나는 ‘어머니’라는 단어를 2만 번도 넘게 외쳤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관심 없다. 내가 들을 말이 아니니까…
“주부습진입니다. 약 처방해 드릴게요. 설거지는 앞으로 엄마가 하세요”
그녀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손에 붉은 반점 같은 것이 부풀어 올라와서 혹시 딸이 수족구병이나 홍역이 아닌가 하여 병원을 찾았다. 그때 의사에게 들은 말이다. 그의 따가운 눈초리 따위에 우리집 설거지의 주체는 바뀌지 않았다.
“얘야, 교복값 입금했다. 빨리 은지 교복 맞춰줘라. 나는 너 휠라 사 입혔는데, 넌 얘를 왜 그렇게 키우니”
기숙사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에게 교복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문제로 나는 딸에게 삐져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미안했던지 내가 아닌 외할머니에게 교복을 맞춰달라고 한 것이다. 교복값과 친정엄마의 입금액을 비교하고 나서야 나는 교복을 맞춰주었다.
이렇게 주로 세 가지 방법으로 나는 그녀를 억압했다. 첫째, 분별력이 없는 어린 그녀에게 정중한 태도와 말투를 강요했다. 엄마라는 호칭이 아닌 어머니라는 호칭과 존댓말을 쓰게 했다. 그녀는 중학생이 되면서 부모를 대하는 태도와 말투가 친구들과 확연히 다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서야, 어머니라는 말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현했지만, 나는 그녀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둘째, 워킹맘인 나를 돕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여러 집안일을 도왔고, 그중 설거지는 그녀가 책임지고 혼자 해야 할 몫이었다. 아마 그게 싫어서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것 같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된 그녀는 집안일에서 해방된 가벼운 마음으로 나를 엄마라고 불렀다.
셋째, 돈에 대한 것이었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녀를 앉혀놓고 자주 경제교육을 했다.
“대학 가면 큰돈이 들어.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든지, 빚을 내든지 해야지…”
“돈 벌면서 야간대학을 다니는 사람도 많아. 군인이나 공무원도 괜찮겠어”
그녀는 돈이 무서운 줄 아는 국립대학교 학생이 되었다. 올봄에 자동이체 설정이 만료되었던지, 3달간 그녀의 통장으로 용돈이 입금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때처럼 그녀는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 나에게 용돈을 부탁했다. 그래서일까. 내 생일은 안 챙겨도, 할머니 생일은 꼭 챙긴다.
3대째 내려오는 이상한 내리사랑
이런 나의 이상한 내리사랑은 3대째 내려오는 가풍이다. 아버지에게서 사랑받지 못했으니, 물려받을 재산만큼만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나라며 계산기를 두들겨 본다. 다 쓴 계산기를 서랍에 넣지 않고 계속 손에 들고선 생각한다. 딸을 키우는데 들어간 돈도 계산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준 만큼은 어떻게 받아야 하나라며 계산기 버튼에 손가락을 얹혔다가 말았다. 내가 딸에게 받을 걸 생각하는 것처럼 아버지도 나를 통해 무언가 얻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을 무엇일까?
“요즘, 누가 애들을 때려~”
라고 말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기에 이미 나에게서 그것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매슬로는 인간의 최종욕구가 자아실현이라고 했다가 말년에 자기초월의 욕구라며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다.1) 아버지는 매슬로처럼 자신의 강한 자기애를 80이 다 되어 잠시 초월해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욕구 피라미드의 끝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더글러스 캔릭등은 매슬로우 이론을 진화론 매커니즘에 맞춰 자녀 양육이 최종욕구라고 설파했다.2) 쉰이 다 돼가는 나는 더글러스가 매슬로우 이론을 수정한 것처럼, 아버지의 죄책감을 오마주해 보련다. 그렇게 딸에게 용서를 빌 마음의 시스템을 정비해야 할까. 말까.
아버지가 대 놓고 나를 혼낸 것과 내가 교묘하게 딸을 억압한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어쩌면 나는 아버지와 비슷한 강도와 주기로 손찌검하고 싶었지만, 바뀐 세상에 맞추느라 수위와 온도를 조절해서 합법적인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던 건 아닐까. 내가 아버지와 풀지 못했다고 해서, 그녀와 풀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내가 떨었던 것처럼, 내 돈 앞에서 그녀가 떨고 있다.
팔십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나에게 눈물을 보이며 미안하다고 하셨고, 쉰이 다된 나는 그녀에게 용서를 빌 준비 중이다.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지만, 그녀는 마음으로 나를 이미 용서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가장 큰 피해자는 내 아버지, 또는 내 할아버지가 아닌가 하고 생각에 잠긴다.
1)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1943)
2)켄릭 등이 재조명한 욕구 피라미드(2010)
다음 주 일요일 오전 11시
<사랑을 사유하다> 마지막 8화로 이어집니다.
총 8화로 구성 예정인 <사랑을 사유하다> 시리즈는 처음부터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사랑을 사유하다> 1화-지적 사기 전과 1범이 되다
https://brunch.co.kr/@youyeons/26
<사랑을 사유하다> 2화- 사랑의 시작, 나를 아는 것부터~
https://brunch.co.kr/@youyeons/28
<사랑을 사유하다> 3화- 술잔에 비친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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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유하다> 4화- 결핍은 사랑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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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유하다> 5화- 동전 세 개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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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유하다> 6화- 그 아버지의 그 딸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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