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사유하다> 최종회 8화
어린 시절 내 아버지는 저녁 반주로 두꺼비가 그려진 빨간 뚜껑의 25도 소주를 즐겼다. 안주는 아무리 씹어도 질리지 않는 장인에 대한 해 묶은 감정이었다. 아버지는 교회 장로였던 장인에 대한 감정을 신나게 교회 다니는 나에게 종종 투사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게 아니고, 원숭이가 사람이 된 거야. 하나님이 만든 네 할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무시할 순 없는 거지”
내 육신의 아버지는 술상을 들고 오는 나를 마주 앉혀놓고선 나의 하나님 아버지를 그렇게 부정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쉰이 다된 나도 아버지를 닮아 하루의 피로를 혼술로 풀곤 한다. 불콰한 취기는 술값을 하려고 내 무의식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그렇게 아버지를 오마주 하며, 어린 시절의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교회에서 찾으려 했던 기억을 소환해 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성경 요한일서 중에서
집에서 듣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말을 교회에서는 쉴 새 없이 들을 수 있다. 관심은 덤이다. 성가대 가운을 입고 찬송가를 반주하면 피아노 실력과 무관하게 나의 연주는 은혜롭다는 은유로 포장되었다. 그 은혜의 힘으로 교회 성도들은 나에게 박수와 칭찬을 보냈고, 그걸 나 혼자 보기 아까웠다. 내가 전도에 열을 올린 것은 친구들에게도 그 은혜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나 혼자 받을 순 없어. 우린 친구잖아. 교회 같이 다니자”
청소 시간에 마대자루를 내팽개친 채 무릎 꿇고 친구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전도한 내 친구가 또 다른 친구를 전도했다. 피라미드처럼 이어진 전도 행렬에 우리 교회 학생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졌다. 그러나 전도에 불순한 목적이 있던 나라는 존재는 점점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게 되었다.
“유연아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잖아. 앞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
30년 전 교회의 여름 수련회 행사 때 받은 이 편지는 마니또 친구가 보낸 것이다. 그가 정확하게 본 나의 요란함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나는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하나님에게도 그랬으리라.
편지를 받았을 즈음, 교회 청소년학생회 회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교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려던 나의 욕심을 눈치챈 현명한 회원들은 내가 아닌, 내가 전도한 친구를 회장과 총무로 뽑았다. 마니또의 충고를 무시한 나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공부를 핑계로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신앙을 저버린 벌인지, 마니또의 충고를 무시한 저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문대에 가게 되면서 빈 수레가 맞다는 걸 증명해 냈다.
졸업 후, 나는 빈 수레를 채울 쉬운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된 사랑이라는 단어를 나에게 쏟아붓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나를 끊임없이 쳐다보는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님과 종교적 거리두기를 하며 십수 년이 반짝하고 지났다. 아이가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는 중학생이 된 어느 날, 15점이던 아이의 수학 성적이 95점이 되는 기적을 본 나는 그 거리두기를 해제했다.
“합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꼭 들어주신대요. 그러니까 엄마도 저와 같이 기도해요”
나는 성가대의 내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거짓으로 친구를 전도했고, 딸은 자기 성적을 올리기 위해 진심으로 나를 전도했다. 나는 교회를 다니며, 그녀의 손을 붙들고 기도했다. 그 값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다. 원하던 대학에 그녀가 가면서, 원치 않았던 코로나가 나에게 왔다.
하나님은 코로나라는 키질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었고, 나는 학생회 때 요란한 빈 수레라는 타이틀에 이어 마흔 넘어서는 쭉정이 신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꼳꼳한 자세로 유튜브 설교를 보다가 점점 빨래를 개면서 보거나 누워서 보았다. 그리고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된 사이, 내 어머니처럼 교회의 집사 임명장을 받았지만 서명하지 않았다. ‘경건한 생활로 성도의 모범이 되며, 사랑과 봉사로 복음 전도에 힘쓰겠다’는 맹세를 지킬 자신이 없던 나는 고등학교 때와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핑계로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핑계 대던 공부로 겨우 전문대에 가더니, 마흔 넘어 핑계 댄 공부로 시답잖게 사르트르의 말에 눈이 간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를 원해서 나를 지으셨다’는 성경의 권위로 특별한 존재였던 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사유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실존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지으셨지만 나는 그분을 사모한 적이 없다. 모두 거짓이다. 어린 시절에는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부모가 되어서는 아이 대학을 보내기 위해 교회를 섬겼다. 교회를 버릴 때는 어떠한가. 고등학교 때는 입시 공부를 핑계로, 쉰이 다 된 지금은 철학 공부를 핑계 대었다. 그저 필요에 따라 이용만 하다가 버린다. 나는 신앙도, 신념도, 철학도 없이 살고 있다. 어쩌면 죽기 바로 전에 다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고 천당에 한 자리 맡아 놓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지옥에 갈 용기가 없어서 잠시 하나님과 일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걸까.
그동안 <사랑을 사유하다> 시리즈에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사랑을 사유하다 시리즈가 아닌 다른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총 8화로 구성된 <사랑을 사유하다> 시리즈, 처음부터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사랑을 사유하다> 1화-지적 사기 전과 1범이 되다
https://brunch.co.kr/@youyeons/26
<사랑을 사유하다> 2화- 사랑의 시작, 나를 아는 것부터~
https://brunch.co.kr/@youyeons/28
<사랑을 사유하다> 3화- 술잔에 비친 나를 사랑한다
https://brunch.co.kr/@youyeons/29
<사랑을 사유하다> 4화- 결핍은 사랑을 싣고~
https://brunch.co.kr/@youyeons/30
<사랑을 사유하다> 5화- 동전 세 개의 첫사랑
https://brunch.co.kr/@youyeons/31
<사랑을 사유하다> 6화- 그 아버지의 그 딸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https://brunch.co.kr/@youyeons/32
<사랑을 사유하다> 7화- 3대째 내려오는 이상한 내리사랑
https://brunch.co.kr/@youyeons/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