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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Oct 24. 2017

인.생.곡.예.

쇠라의 '서커스'와 바이런의 '마제파'

(서커스(Circus)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로마시대 이후로 유럽에서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근대 19세기 후반 인상파 화가들은 곡예사들을 그들의 화폭에 즐겨 담았는데 위의 그림은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작품이고 그가 1891년 3월 죽기 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물론 그 주제는 그림의 재목처럼 ‘서커스(The Circus)’다. 한 화가의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화폭에 그려진 그림인데다 또 19세기의 막바지로 질주하는 세기말적 암울한 길목에서 인류의 불확실한 삶을 암시하듯 그려진 이 그림은 한 화가의 삶도 그렇고, 온 인류의 삶도 그렇게 서커스의 곡예처럼 아슬아슬하다는 뜻은 아닐까?


기술적으로 보면 이 그림은 쇠라가 창안하고 그린 포인틸리즘(점을 찍어 그림 완성)과 비슷한 디비전이스트 스타일(Divisionist style)이다. 거기다가 잘 알려진 후기-인상파(Post- Impressionism)가 아닌 신-인상파(Neo-Impressionism)로 분류되는 그림으로 복잡해보이는 용어로 설명하지만 사실 그림 자체는 감상하기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선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어딘가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작품처럼 보인다. 깔끔하게 완성된 작품은 아니란 말이다. 이 그림은 제 7회 독립 살롱전(Salon des Independents)에 출품전시되었고 격한 모방논쟁도 야기시켰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또다른 프랑스 화가인 줄 셰르(Jules Chéret)가 그린  포스터들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유명한 미술사가인 메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는 이 작품이 1888년 누보 서르크(the Nouveau Cirque)에 발행된 익명의 포스터와 비슷하다고 단언했다. 하여튼, 이 그림은 쇠라가 고안한 테크닉면에서의 디비전이스트 스타일의 '분리'란 말과 비슷하게 이 작품의 내용면에서도 '분리'보인다. 곡예사와 관객, 그리고 부유한 상류층 관객은 서커스 장의 가까운 잘보이는 곳, 즉 관객석 아래쪽 열에 앉았고, 하류층은 먼 뒷쪽 열에 앉아 있어 당시 프랑스 사회의  그대로 전한다. 쇠라는 또 화가 친구인 샤를르 앙그랑(Charles Angrand)도 관객으로 그려넣었는데 맨 앞줄 모자를 쓴 이가 바로 그이다. 왜 노동자 계층의 뒷줄이 아니고...?친구에게 선심 쓴 것일까? 아님 예술가는 상류층이란 암시인가?


19세기 당시 인기가 많았던 프랑스의 서커스는 그 스펙터컬한 규모와 예술적 퍼포먼스까지 합쳐져 많은 작가들과 화가들의 관심도 받았다고 한다. 서커스의 대중적 인기는 다섯개나 되는 서커스 단이 당시 파리에 있었고 그것도 매일 밤 서커스 공연이 열렸다고 하니 일하랴 서커스 공연보랴 바빴을 파리 시민들이었을 것이고 당시 서커스의 인기는 지금 영화와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빅토리아 시대인 가까운 런던의 디킨스 암울함과 달리 세계의 내노라하는 예술가들이 모인 당대 빛의 도시 파리의 서커스는 대중적 인기뿐 아니라 서커스 곡예자체도 엄연히 존중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화가들과 작가들의 관심도 당연히 컸고 그들이 몰렸던 파리의 북쪽 몽마르트에는 서르크 페르난도(the Cirque Fernando)란 유명 서커스 단이 있어 쇠라도 분명 이 서커스 관람을 했을 것이라 짐작이 간다.



비록 완성된 작품은 아니지만 쇠라의 서커스 작품은 곡예사를 바라보는 관객의 감정과 묘기를 부리는 곡예사의 운동성을 한폭에 같이 담았다. 서커스의 양념역할을 하는 앞쪽의 어릿광대는 하얀 얼굴분장과 대비되는 진홍색 머리와 드레스가 뚜렷이 비교되 보인다. 곡예에서의 줄고삐나 고리던지기 곡예사는 미국의 카우보이와 다르게 정장으로 댄디하게 차려입었다. 말 뒤의 곡예사는 거꾸로 선 동작으로 한창 묘기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은 뭐니해도 말을 타는 공중의 소녀곡예사이다. 이 소녀는 아마 이 서커스 단의 가장 인기있는 곡예사임이 분명하리라. 가장 어려운 묘기를 선보이고 그림의 중앙에 배치돼 있으므로 주연배우임이 분명하다.


그녀의 마상재(馬上才) 곡예는 영국 낭만파 시인인 바이런(Byron)의 1819년의 시, ‘마제파(Mazeppa)’를 떠오르게 한다. 바이런의 ‘마제파’란 시는 우크라이나 신사였으며 폴란드-리투라니아 왕을 섬겼고 후에 군사령관이 된 ‘이반 마제파’에 관한 서사시다. 이 시의 제목인 마제파는 젊었을 때 데레사라는 아름다운 백작부인과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나중에 이를 발견한 그녀의 늙은 남편인 백작은 질투심에 이성을 잃었고 그는 마제파의 옷을 모조리 벗기고 야생마 위에 꽁꽁 묶은 뒤 들판을 마구 내달리게 했다고 한다. 또 어떤이는 우크라이나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유럽에 전해 내려오던 이 이야기에서 착안해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시를 쓴 것이다. 하지만 전해오는 이 사랑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님 전해오는 과정에서 과장이 많이 섞였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제파’란 인물은 역사적 인물인 것만은 사실로 우크라이나의 지폐에도 그의 얼굴이 들어 있다고 한다.  바이런은 이 전해오는 이야기에다 시인의 시적 상상을 덧붙여 시를 지었고 그의 시는 러시아의 푸시킨에게도, 프랑스의 빅톨 위고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고 리스트는 교향곡까지 작곡하였다. 이 시에서 바이런은 백작부인이 동양적인 미를 갖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의 눈(the Asiatic eye)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치명적인 미모에 빠진 마제파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탈-식민지 방법론에서 이 시를 연구해 유럽인의 관점에서 본 아시아 동양인 뿐 아니라 서유럽의 눈으로 본 동유럽을 분석한다. 하여튼, 이 시에서 눈먼 사랑의 대가로 야생마 위에 발가벗겨 묶인 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달리는 마제파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해석해 야생마처럼 무분별하게 내달리는 인생의 시험대위에서 고통과 인내를 감내해야 하는 삶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쇠라의 곡예사처럼 마제파도 곡예사이다. 다만 자유를 박탈당한 채 운명에 속박되 자유로이 곡예를 펼칠수 없는 곡예사인 것이다. 부단히 노력해야지만 달리는 말등위의 삶의 곡예에 능숙해 질 수있는 그러나 예고없는 위험은 어느날 갑자기 터질 수 있는 잠재성을 항상 품고있는 그런 타기 곡예같은 삶이다.



안타깝게도 쇠라는 이 작품의 전시기간 끝까지  살지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비록 완성품이 아니더라도 인상파 동료와 후배 화가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이 작품은 남겼다고 한다. 물론 어떤이들은 이 미완성의 작품이 별로라고 하지만 어떤이는 훗날 큐비즘(Cubism)을 알리는 전조라고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이 주는 주제의식과 사회의식도 염두에 둘만하지만 미완성이라는 점과 서커스 곡예사의 아슬아슬한 묘기장면을 태연히 그리고 재미있게 그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걸 완벽하게 끝내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바이런의 ‘마제파’ 시처럼 또 아슬아슬한 위험을 이기고 살아가는 곡예사의 삶처럼 우리 삶은 곡예가 아닐까? 위태롭지 않기 위해, 삶의 안전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반복되는, 재미없는, 마제파처럼 묶인 채 실려가는 마상연습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이 보험 저 보험 가입하며 안전을 최대한 보장받으려 갖은 애를 쓴다.  ‘마제파’처럼 어느날 찾아온 치명적 사랑으로 운명을 감수해야하는 그래서 마제파의 운명의 말타기처럼 고통이 여행의 동반자처럼 따라오고 이를 인내로 버텨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일지 모른다. 그런 ‘곡예같은 삶’을 쇠라의 관객들 모두, 부유층이든 하류층이든, 곡예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말등에서 위로 훌쩍 솟아 공중에 뜬 소녀곡예사의 찰라(Moment)를 쇠라는 포착했다. 그 찰나는 정지된 상태이지만 미완성이다. DVD로 영화보며 스톱시킨 장면처럼... 바닥에 떨어질지 아님 말등에 안전하게 안착할 지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관객들… 바로 이 순간. 그들은 곡예를 보는 것이 아닌 바로 자신들의 삶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웃고, 울고, 야유하고, 박수치고, 그렇게 무대위의 곡예사와 관객은 하나 즉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다. 곡예란 문자 그대로 직선의 예술이 아닌 곡선의 예술이다. 그것도 우아한 나선형의 ‘로코코’ 곡선이 아니라 구부러지고 찌그러진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곡선’이다. 이 불확실성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키고 치유하는게 곡예이며 또 우리 이다. 그러나 우리의 곡예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쇠라의 그림처럼… 왜냐하면 완벽한 곡예란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벽한 삶도 비-논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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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 ‘The Circus’ by Georges Seurat. 1890-91. Oil on canvas. 185 cm × 152 cm (72.8 in × 59.8 in). Musée d'Orsay, Paris

프랑스의 여러 화가들이 이 마제파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겼다. 위 그림은 바이런의 '마제파'시 내용을 따라 그린 프랑스의 역사화 화가 오레이스 베르네의 그림.


Horace Vernet (1789–1863)

'Mazeppa and the Wolves'. 1826. oil on canvas. 97 cm (38.2 in)×136 cm (53.5 in). Musée Calvet, Avignon

마제파를 그린 똑같은 주제의 '제리코'의 판화


Théodore Géricault, French, 1791–1824

with Eugène Lami, French, 1800–1890

Lithograph. 8 1/8 x 6 1/4 in. (20.7 x 15.8 cm).

University of Y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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