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빨래가 주는 압박 & 안도

야근에서 비롯되어 여행으로 도드라진 그녀&그의 여행일기

by 직업은투명인간

여행이 일주일을 넘어서니 빨래가 문제였다. 대형비닐에 꽁꽁 싸매 숙소 한구석에 방치되어 봉인이 해제하는 날만 기다렸다. 양말만해도 7켤레, 그녀와 합하면 14켤레였다. 속옷과 겉옷까지 포함하면 빨래양은 상당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빨래는 우리를 압박했고 무엇보다 입을 옷이 점점 없었다. 이대로 가면 양말멸종은 시간문제였기에 오늘 기필코 세탁을 해야 했다.


로비에서 근처 세탁소를 문의하니 직원은 손가락으로 2층을 가르쳤다. 2층에 있다고? 등잔 밑이 어두웠다. 1층 로비만 기웃거려 2층은 관심이 없었는데 2층 복도 끝에 laundry room이라고 팻말이 보였다. 숙소에 24시간 운영되는 세탁실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여행자에게 낮에 보다 밤에 하는 세탁이 유리하기에 오늘일정을 마치고 다시 찾기로 했다.


디즈니랜드를 다녀와서 그녀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보였다. 그런데 피로의 무게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어제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내었고 그 결과 체력이 방전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몸이 천근만근이라며 바닥에 누워서 벽에 종아리를 기대어 한참을 있었다. 사력을 다한 만큼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쉬어가는 의미로 숙소 근처를 가볍게 보기로 했다. 어제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트리와 놀이기구가 있는 곳이 떠올랐다. 지도상에 비슷한 위치에 파리시청사가 있어 혹시 아닐까 하며 그 곳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시청사가 맞았다. 시청사는 현대적이고 신식 건물이 아니었다. 고풍스러웠고 외벽과 꼭대기에 수많은 인물상이 우뚝 서 있어 미술관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시청사 건물이 하나의 작품이었다. 시청사 외벽에 조명 라인으로 덮여 있어 밤이 되면 화려하게 변신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낮 시간대라 10명도 안 되는 관광객이 공터를 서성이며 한적함을 메웠지만, 밤에는 다를 것 같았다. 밤에 다시 찾기로 하고 시테 섬으로 이동했다.


2019년도 뉴스에 노트르담 사원이 나왔다.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비록 우리나라 문화재는 아니지만, 화재로 첨탑이 소실되는 모습에 울컥했었다. 2005년도 파리에 배낭여행을 왔을 때, 사원 앞 공터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휴식을 취하는 일상적인 장소였기에 안타까움이 더 했다. 현재는 보수 중으로 펜스로 둘러졌고 화재당시 사진이 줄줄이 붙여 있었다.


여기에서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오래전 여기서 촬영한 사진과 지금의 노트르담 모습을 함께 담아 보는 것이었다. 오래전 사진을 그녀한테 보여주니 내 모습에 놀란 눈치였다. “사진 속 빨간 자켓이 ?? 오빠?” 구석기시절의 여행패션에 한번 놀라고, 나의 풋풋한 모습에 다시 놀랐다.


예전 사진을 들고 현재의 노트르담과 교차하는 부분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니 하나의 노트르담이 완성되었다. 위에는 현재 노트르담이 있고, 아래에는 과거 노르트담과 내 모습이 담겼다. 애잔함이 밀러왔다. 사진에 사진을 찍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옆에 있던 프랑스 소녀가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프랑스 소녀가 나의 구석기시절 사진을 보고 놀랐지 옆에 친구와 귓속말을 주기 시작했다. 프랑스 소녀는 내 사진을 다시 보고, 나를 보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순간 민망함에 뭐라고 한마디를 던져야 할 순간이었지만, 가벼운 웃음으로 대신했다.


나만의 오해일까? 그녀한테 파리여자애가 내 옛날사진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이야기하니 착각이라며 받아쳤다. 소실된 노트르담을 보고는 슬퍼하다 오빠와 눈이 그저 마주쳤다는 주장이었다.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수 있었다. 만약 프랑스 소녀한테 물어보았다면 착각인지, 공감인지 결론을 내렸을 텐데 영화처럼 열린 결말이 되고 말았다.


센강의 다리에서 가로등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전단지로 생각하여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포스터에 노트르담이 있어 관심을 가졌다. 빨간색 배경에 흰색라인으로 된 노트르담 이미지와 폰트가 어울리는 심플하면서 멋스러운 포스터였고 마켓을 의미하는 Marche 단어도 있었다. 위치도 가까워 놓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뻔한 여행을 식혀주는 시원한 소나기였다. 마켓은 세익스피어컴퍼니 서점 옆의 작은 공원에서 열렸다.


조그만한 철문을 통과하니 공원이 나타났고 가운데 연못을 기준으로 20여개의 부스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마켓의 느낌은 작지 않았다. 주로 치즈, 소세지, 빵 등 먹거리가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수제로 만든 로컬음식이라 맛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그녀는 까눌레를 알고 있었다. 내 눈에는 작은 국화빵처럼 보였지만 까눌레는 프랑스 전통 디저트라고 했다. 주인은 우리의 관심을 알고는 불어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미소로 답을 대신하고 카눌레 몇 개를 구입했다. 즉석에서 한입 베어 물었다. 겉쫄속쫄! 겉은 쫄깃하고 속은 더 쫄깃하고 담백해 엄지척이 자동으로 만들어졌다. 알아듣지 못한 주인의 설명이 디저트에 대한 자부심인지 맛으로 증명되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세탁물부터 챙겼다. 양말도 떨어지고 옷에는 여행자의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행 출발 전에 필요한 아이템을 챙긴다고 했지만, 닥쳐보니 빨래를 구분을 위한 세탁망이 그리웠다. 이번은 어쩔 수 없이 짬뽕세탁이었다. 세탁물을 챙겨서 2층으로 내려갔다. 오늘도 중년부부가 2층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기대어 있어 정체가 궁금했는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년부부는 빨래를 돌리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세탁실에 들어가니, 습하고 열기가 가득했다. 빈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버튼을 눌렀지만 작동이 안 되었다. 밤 11시가 넘어 건조까지 마치려면 갈길이 먼데 난감했다.


마침 소파에 있던 중년남성이 들어왔다. 그도 우리처럼 잠옷의 가벼운 차림이고 낯익은 얼굴이라 도움을 청했다. 그는 친절한 독일 중년이었다. 손짓로 랭귀지로 상황을 알려주니 그는 웃으면서 세탁방법을 알려주었다. 독일 중년이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무뚝뚝함을 떠올렸는데 제대로 된 착각이었다.


빨래가 돌아가니 마음이 놓였다. 거품을 만들어 내며 세탁이 시작되었다. 빨래가 거품에 잠기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빨래는 모를 것이다. 세탁실의 습함과 소음까지 좋게 느껴졌다. 나 홀로 세탁실에서 감상에 빠지며 긴 여행임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는 눈꺼풀이 계속 내려가고 올릴 힘이 없어 보였다. 홀로 세탁실과 로비를 전전하며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건조까지 완료되니 자정이 넘었지만, 밀린 숙제를 끝냈다는 사실에 후련했다. 방에 들어가니 그녀는 침대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기다린다고 했는데, 피곤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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