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빗속의 캐리어 라이딩

야근에서 비롯되어 여행으로 도드라진 그녀&그의 여행일기

by 직업은투명인간

비행기가 런던 지면에 닿았다. 바퀴와 활주로가 맞장구를 치듯이 쿵!쿵! 거리는 착륙소리는 구원의 소리였다. 비행의 끝을 알리며 얼음처럼 굳어있던 몸에 안도감이 돌았다. 그녀는 잠에서 깨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런던에 도착하면 그토록 바라던 여행이었기에 가슴에서 격한 울림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행의 고단함의 영향인지 고요했고 밋밋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늘에서 먹는 라면은 평생 잊을 수 없다며, 부은 얼굴을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입국심사장에서 크로스백과 캐리어를 보더라도 동양에서 온 여행자로 보였지만, 방문목적을 “I am a traveler”라고 답변하니 우리 스스로가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었다. 비로소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의 보호자였고, 어디를 가든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 의지해야했다. 무사히 여행이 끝나길 바라며 그녀 손을 꼭 잡았다.

한국에서 출발이 지연되어 입국심사를 마치니 오후 7시가 되었다. 계획대로였으면 숙소에서 짐을 풀어야 할 시간인데 아직 공항이었다. 늦은 밤이 아니라 초조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커피 한잔할 여유가 있지 않았다. 초조함과 여유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우선 공항에서 유심 구매와 교통카드 발급이란 숙제를 해야 했다. 공항 편의점에서 유심이 팔았다. 우리는 3개국이 포함된 유심을 사야했다. 인터넷 후기를 참고하면 쉽게 해결할 줄 알았는데 종류가 너무 많아 진땀을 흘리며 헤매었다. 몇 분을 그러고 있으니 20대로 보이는 직원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익숙하지 않는 영국식 억양에 순간, 멈칫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입국심사원 보다 편의점 직원과 많이 대화를 나눴다. 직원은 친절했고 적극적여서 그의 도움으로 유심 구매와 교통카드까지 한 번에 해결했다. 이런 직원이 크면 영국의 젠틀맨이 되는 게 아닐까?


교통카드에 요금을 충전하며 다들 왜 런던물가를 두려워했는지 공감되었다. 지하철 요금이 우리나라의 3배쯤 되었다. 영국식 억양을 듣고 느낀 런던체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요금으로 지폐가 빠져나는 게 더 현실적으로 돈 보다 강한 임펙트는 없었다.


공항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빛나고 있어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똑딱이 카메라를 꺼내어 팔을 뻗어 셀카처럼 함께 찍었다. 사진을 보니 반반치킨이었다. 표정에는 아직까지 긴장반, 설렘반이 있었고, 트리는 다행히 일부라도 나왔다. 평소에 그녀라면 여러 장을 요청했을 텐데 기운이 없었는지 한두 컷으로 끝을 내었다.


런던지하철은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렀다. 두꺼운 빨간색 원형라인에 가운데 파란색으로 채워진 네모박스에 흰색으로 역명이 적혀 있었다. 디자인이 참 런던스러웠다. 공항에서 찍은 여권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데 이런 말을 하니 그녀가 피식 웃었다. “오빠 누가 보면 1년 넘게 산 사람인 줄 알겠어” 지하철에는 사람으로 붐볐지만, 분위기는 조용했다. 핸드폰을 하는 모습은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였는데, 의외로 책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와 나의 말소리가 침묵을 깰까 소심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뜻밖에 지하철에는 와이파이가 안 터졌다. 테러방지라는 말이 있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고 미리 다운받은 지하철노선도를 보며 길잡이를 전담했다. 답답함과 불편함은 나의 몫이었다.


승객 중에서 중년남성의 패션은 잡지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정리된 수염과 슈트 핏, 머리에서 발끝까지 멋짐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나의 50대가 연상되었다. 어떤 아저씨의 모습일지 지금부터 관리가 필요했다.

빅토리아역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렸다. 공항에서 줄곧 지하철을 타고 날씨를 예상하지 못했다.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희망회로에 문제가 발생했다. 숙소는 역에서 3~4km정도 떨어져 있어 우버택시를 타야했는데 신용카드 등록을 안하여 우버택시 이용이 제한되었다. 나중에 해야지 하던 늦장이 화근이 되었다. 안타까웠다. 런던에서 비는 일상이라고 하지만, 캐리어 2개와 여행 가방을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비는 곤욕이었다. 비 오는 날씨에 숙소까지 걸어야 했기에 런던비의 빗방울은 마음을 미안하게 했다.


바람 한 점 없고, 평탄하지 않는 지면을 캐리어를 끄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빗방울은 땀구멍을 통제 불능으로 만들었고 롱패딩도 한몫 거들어 한증막에서 캐리어를 끄는 기분이었다. 롱패딩을 넣을 때가 없어 입고 있었더니 땀으로 샤워를 당했다. 길에 웅덩이가 꽤 있어 그녀의 신발은 이미 물속을 헤엄치며, 빗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열기와 물기를 인내하며 걸었다. 다행히 그녀의 눈에서 레이저는 발사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했다는 안심도 잠시, 런던의 엘리베이터가 낯설었다. 엘베를 먼저 탔던 그녀는 빗물에 젖은 신발보다 더욱 아찔한 런던신고식을 받았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추지 않고 순간 3층으로 떨어지며 멈추었던 것이다. 로비에서 캐리어를 올리고 있던 상황이라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이후 엘리베이터를 잘 이용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 10시였지만, 여행첫날이라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본전을 위한 여행자의 의무였다. 역 근처에 펍을 찾아 나섰다. 조금 전에 비를 맞으며 캐리어를 끌며 지나왔던 길이지만, 숙소를 확인했다는 안심 때문인지 주변을 볼 여유도 생겼다. 길거리 여기저기에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저 있었다.

펍에 도착하니, 늦은 시간인지 가게는 조용했고 OOOOO이란 이름처럼 손님들 옆에는 큰 배낭과 여행 캐리어가 함께 있었다. 터미널 옆이라 버스타기 전에 가볍게 한잔 마시는 분위기였다. 런던에서 생각하고 있던 맥주가 있었다. 바로 기네스였다. 그녀는 맥주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에게 한국인이 선호하는 런던의 맛, 기네스를 추천했다. 종업원이 기네스 맥주 2잔을 테이블에 놓은데 여기가 런던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마시기 전에 습관처럼 핸드폰으로 사진부터 담았다. 행복감이 밀려왔다. 오늘의 사소한 고생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녀는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녀는 흑맥주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직 라거였다. 펍의 루즈하고 정겨운 분위기에 비행의 고단함과 여행의 긴장을 서서히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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