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같은 장소, 다른 시선

야근에서 비롯되어 여행으로 도드라진 그녀&그의 여행일기

by 직업은투명인간

한국에서 챙긴 전기장판은 신의 한수였다. 장판 위에 눕자마자 새벽이 사라지고 아침을 맞는 수면도둑이었다. 나중에 한 겨울 프라하에서 개시하려 했는데, 어제 밤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아 시작부터 찜질이 필요했다. 여행 전날에 짐을 확인하며 그녀가 전기장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급하게 주변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그녀의 예지력일까? 런던에서 쭉 사용할 예감이 들었다.

눈을 뜨고, 잠시 멀뚱히 앉아 있었다. 창문사이로 알싸한 한기가 느껴졌다. 창문 아래에 있는 라디에이터가 방의 온기를 책임졌지만 방 전체를 데우는데 역부족이었다. 대신 어제 널어놓은 양말을 물기 1도 없는 꼬들꼬들한 오징어로 재탄생시켰다. 명품 건조기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잘 잤을까? 여러 일로 고단했을 텐데, 먼저 일어나 아침을 맞이했다. 나 역시 부랴부랴 준비를 마쳤다.

아침부터 부지런쟁이가 되어 숙소근처를 가볍게 걸었다. 동네가 한산했다. 주택은 책꽂이 책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붙어있으면 정든다지만,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집 원수로 맺어지면 스트레스가 여간 보통이 아니다. 우리는 후자에 공감대가 컸다. 건물마다 큼직하게 넘버링이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현관 넘버링을 한국으로 따지면 홍길동 대신 숫자인 셈이다. 우리와 관련 있는 숫자를 찾으며 동네를 걸었다.


대다수의 현관에 트리가 장식되어 크리스마스 시즌임을 느꼈다. 어느 집주인의 센스로 우리를 웃게 만든 집도 있었다. 그 집은 남들하고 다르게 현관장식이 아닌 창문에 크리스마스 연출을 해 놓았다. 산타크로스를 창문 밖에 설치해서 마치 창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우리처럼 피식 웃었을 것이다.


1일차의 일정은 그녀가 세웠고, 나는 따르기를 하면 되었다. 4년 넘게 연애를 해서 서로의 관심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로의 관심사를 테트리스 마냥 결합하여 이곳저곳을 일정에 포함시켰다. 여행하면 현지에서 서점을 놓치지 않는 편이라 런던에서 꽤 유명한 돈트북스도 찾았다. 내부로 들어서니 현대식 서점의 인테리어에 익숙했던 터라 돈트북스의 구조와 긴 세월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압도당하기에 충분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치 가정집의 나무계단 같았고 천장은 유리창으로 되어 쾌적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그런데 실내에 안타까운 문구가 보였다. 사진금지! 서점에 통로가 좁아서 멋스럽지만, 누군가 사진촬영을 하게 되면 교통정체가 될 수 있었다. 서점은 사진 찍는 곳이 아니라 책 보는 곳이기에 독서를 위한 분위기가 우선이었다.


그녀와 나는 독서 취향이 반대였다. 그녀가 소설이면 나는 비소설이다. 우리는 각자의 관심분야를 찾으러 1층과 2층을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빈손이었고, 나한텐 책 한권이 들여 있었다. 동화 코너에서 그녀가 유심히 보던 동화책이 있었는데 최종선택을 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손바닥만 사이즈의 등산 주제의 영문서적을 구매했다. 영어 울렁증으로 비싼 종이 장식품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예상했다는 눈빛으로 허락해주었다.


거리에는 기념품 매장이 자주 보였다. 빨간우체통, 2층버스, 빅뱅 등 런던 시그니처를 아담한 기념품으로 만들어 놓으니 눈길이 계속 갔다. 마지막 날에 기념품을 살 계획이었지만, 눈앞에 기념품을 보니 마음이 흔들려 들어갈까? 말까? 밀당을 했다. 발걸음은 매장 앞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뭐 필요해요? 우리 얼굴에 한국인이라 쓰여 있었다. 종업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반겼다. 몇 마디를 주고 받으니 그는 손흥민이 팬이라며 우리를 특별히 잘 해주겠다며 지름신을 호출하고 있었다. 나는 열쇠고리 늪에서 금이냐, 은이냐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은 후드티에 고정되었다. 우리는 겨울여행을 왔고 이제부터가 시작이기에, 후드티는 여러모로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가게의 양쪽 벽면을 후드티로 채울만큼 다양했다. 그녀는 아이쇼핑이 아니라 후드티를 구매하여 매장을 나간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고개를 좌우 위아래로 돌리며 벽면의 후드티를 스캔했다. 나 역시 스캔을 하며 그녀의 취향에 공감대를 실었다.


그녀와 보는 눈은 비슷했다. 우선 둘다 LONDON 철자만 들어간 심플한 후드티로 정하고 색상을 고민했다. 마음에 드는 색상은 3가지로 녹색, 남색, 와인색 좁혔고, 다시 와인색을 포기하며 후드티를 쇼핑을 마쳤다. 숙소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와인색 후드티도 추가로 샀어야했는데 아쉬움이 많았다. 여행고수는 기념품에 아쉬워하지 않는다지만,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먼 초보여행자였다. 나중에 후드티를 꺼내는 겨울이되면 런던여행이 그리울지 모르겠다. 유럽여행에서 잘한 일을 꼽으라면 단연 후드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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