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돌아오면 뭐 먹을까?

야근에서 비롯되어 여행으로 도드라진 그녀&그의 여행일기

by 직업은투명인간

새벽 2시가 넘었다. 아침에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짐정리가 아직까지 덜되었다. 미리 짐을 챙겼어도 잠을 편히 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헤아릴 수 없는 긴장반, 기대반으로 뜬 눈으로 밤을 보냈을 거라 위안하며 새벽까지 여행준비가 한창이었다. 얼핏 다 챙겼다며 다시 확인을 하면 짐이 하나둘 늘어났고, 누군가의 체력이 바닥이 날 때까지 반복이었다.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며 마지막 숙제를 찾았다. “오빠, 계란 8개 어떡하지?” 엊그제 장보고 남겨진 계란이었다. 대부분 반찬은 해치웠는데 계란은 반 이상이 남았다. 새벽에 계란을 8개를 먹는다는 건 모험이었다. 혹시나 여행 대신 응급실로 가거나 비행기에서 화장실을 전세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계란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답을 찾은 듯 계란을 툭툭 깨더니 뭔가 준비했다. 쪽파도 다져 넣으며 구색을 갖췄다. 프라이팬에 계란 물을 붓고 마는 것을 보니 계란말이었다. 새벽의 효과일까? 평소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계란말이를 반찬통에 담으니 딱 맞게 한통을 채웠다. 그랬다. 계란의 운명은 런던이었다. 계란말이를 런던에서 먹게 될 줄이야. 여행이 아니었다면 계란말이의 운명은 맥주안주가 분명했을 것이다. 런던의 어딘가에서 반찬통을 열 생각을 하니 행복했다.


분주했던 새벽은 시간이 해결해주었고 집안 정리는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벗던 일상적인 행동이 눈이 밟혔다. 평소 현관이란 공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신발을 신고 한 달 뒤에 벗는다는 생각을 하니 현관을 나서는 순간이 여행의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도 겨울에 떠났지만, 따뜻한 섬으로 떠나 여름옷을 챙겨 캐리어가 가벼웠다. 이번에는 캐리어가 묵직한 게 여행이 다름이 느껴졌다. 그러나 마음은 그 반대였다.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이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마음에 날을 세우며 고생했을 그녀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녀는 당당히 앞머리에 롤을 장착하고 캐리어를 끌었다.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돌아오면 뭐가 가장 먹고 싶을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떡볶이, 찜닭, 파스타 등 애증의 요리를 쏟아내었다. 맛이 연상되면서 여행에서 돌아오면 누구보다 맛있게 먹을 그녀가 눈에 선명했다. 겨울철 나의 원픽은 평양냉면이다. 얼마 전에도 먹었지만, 평양냉면 특유의 오묘한 맛이 좋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시원한 국물부터 들이키며 한 그릇을 비울 예정이었다. 캐리어를 끌며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먹방토크를 이어갔다.


반면에 유럽여행에서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은 피시앤칩스였다. 생선튀김? 그녀의 입맛을 알고 있기에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피시앤칩스는 유력한 후보였다. 첫 여행지가 런던인 만큼, 눈만 감고 뜨면 런던의 어느 식당에서 앉아 노릇노릇한 생선가스를 보며 감탄하는 순간이었으면 했다. 100일 휴가에서 먹킷리스트를 작성하는 훈련병처럼 우리도 그러했다. 훈련과 여행은 다르지만, 긴 여행이 주는 걱정과 두려움은 같았다.

인천공항에만 도착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 중에 불안감은 단연 비행공포였다. 롤러코스터 같은 난기류를 몇 번을 겪으니 비행기에 탑승하면 덧에 걸린 생쥐마냥, 죽을 맛이다. 하지만 그녀는 비행의 두려움은 덜하다. 예전에 하와이행 비행기에서 일이 터졌다. 난기류로 30분 정도 롤러코스터가 지속되었다. 뒷자리 애기는 멀미하고, 승객은 불안해하고, 앞으로 비행기는 없다고 생각을 할 만큼 생사의 고비였다. 그녀는 움츠린 나에게 듬직함을 보여주었고 이후로 비행기를 탑승하면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 주었다.


탑승시간이 되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탑승 순간부터 얼음모드가 되어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착륙만 기다려진다. 분명 항공권을 예매를 하면서 창가의 3열을 피해서 통로쪽으로 예약했는데 좌석이 변경되어있었다. 안타깝게 창가쪽 좌석이었지만 그녀와 함께여서 문제는 없었다. 자리에 앉아 옆자리 승객을 기다렸다. 15시간 비행이라 옆자리 승객과 눈인사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했는데 오질 않았다. 이륙 직전에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탑승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그녀는 없는 사람 걱정에 힘쓰지 말라며 숙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행기가 움직이더니 옆 좌석이 공석인 채로 이륙을 했다. 장거리 비행기에서 옆자리가 공석이면 행운이 아니던가! 항공사한테 미안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다른 승객한테도 생기길 바래본다.


보디가드 그녀는 숙면 중이다. 비어있는 옆자리로 쓰러져 그나마 편하게 잠들었다. 오늘 새벽까지 짐 챙기고, 계란말이까지 하느라 피곤함을 숙면으로 증명해주었다. 나 역시 숙면으로 증명해주고 싶었지만, 비행기에선 잠드는 게 어려웠다. 여행은 시작되었고, 런던행 비행은 15시간이 소요되지만 우리는 다시 12월 10일로 돌아왔다. 수고한 우리를 위해 마일리지 적립처럼 하루가 더 생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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