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爺(sunya)의 갈색 사유 제8화
독립신문

by 순야 착지

그물을 들어 올린 날갯짓, 그리고 순한글의 찻물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중에는 사냥꾼의 그물에 갇힌 '메추라기 무리'의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사냥꾼이 던진 거대한 그물에 수많은 메추라기가 갇혀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공포에 질려 퍼덕이는 무리를 향해, 지혜로운 메추라기 왕(부처님의 전생)이 차분하게 일러주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모두 그물코에 머리를 하나씩 밀어 넣고, 내 신호에 맞춰 동시에 날아오르자." 무리가 왕의 쉬운 가르침을 알아듣고 한마음으로 날갯짓을 하자, 기적처럼 그물이 통째로 들려 올라갔다. 그들은 가시덤불 위에 그물을 걸쳐놓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 무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뜻을 모아 죽음의 그물을 벗어난 위대한 방편(方便)이었다.

이 지혜로운 메추라기의 가르침은 120여 년 전, 제국주의의 거대한 그물이 덮쳐오던 조선 땅에서 다시 한번 눈부시게 피어났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에 의해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창간호 논설에는 "우리 신문을 한문으로 아니 쓰고 언문으로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라고 명시되어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권력처럼 독점하던 어려운 한문(漢文)을 과감히 버리고, 남녀노소, 양반과 천민 할 것 없이 누구나 쉽게 읽고 깨우칠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외세의 압제와 무지라는 그물에 갇힌 민족에게, 다 함께 날아오르자고 외치던 지식인들의 간절하고도 눈물겨운 신호였다.

4월 7알, 순야옹은 흑성산 자락에 장엄하게 자리한 천안 독립기념관에 들어선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은 듯 비상하는 거대한 '겨레의 탑'을 지나, 축구장 크기의 웅장한 '겨레의 집' 앞 광장에 서면 펄럭이는 수많은 태극기 물결이 벅차게 가슴을 두드린다. 선열들의 숨결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 곳은 제2전시관, '겨레의 시련'관이다.

근대화의 좌절과 일제 침략의 아픔이 서린 전시관 입구를 지나 존2(Zone 2)의 애국계몽운동 코너로 접어들자, 유리 진열장 너머로 빛바랜 종이 위에 박힌 활자들이 순야옹의 발길을 단단히 붙잡는다. 바로 『독립신문』 창간호다. 가로 22cm, 세로 33cm 남짓한 아담한 크기의 신문은 총 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세 면은 한자 하나 없이 오직 순한글로만 조밀하게 채워져 있고, 마지막 4면은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The Independent)으로 구성되었다. 굵은 제호 아래로 세로로 길게 내리쓴 기사들 사이사이, 단어와 단어를 여유롭게 벌려 놓은 혁명적인 '띄어쓰기'의 흔적이 선명하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문자를 독점하는 것은 지독한 아집이다. 진짜 지혜는 높은 단상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 모두의 눈을 뜨게 하는 데 있다. 한자라는 거대한 장벽을 허물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찍어낸 이 투박한 한글 활자들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무명(無明)에 갇힌 이들을 세상과 연결해 주는 가장 평등하고 따뜻한 빛이었음을 이 전시관 한복판에서 절절히 깨닫는다.

묵직해진 가슴을 안고 전시관을 빠져나온 순야옹은 한반도 모양으로 조성된 '무궁화 테마공원'으로 향한다. 아직 무궁화가 피기엔 이른 4월이지만, 여름날 붉게 타오를 꽃망울을 단단히 품고 있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따스한 봄볕이 평화롭게 내려앉고 있다.

순야옹은 한적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배낭에서 스테인리스 보온통을 꺼낸다. 뜨거운 물이 표일배를 통과하며 진한 보이숙차를 우려낸다. 갈색 찻물이 잔을 채우는 동안, 독립기념관의 산등성이 너머로 불어오는 4월의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찻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다. 떫은맛 뒤에 찾아오는 부드러운 단맛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차별 없이 모든 이의 갈증을 달래주는 이 한 잔의 찻물처럼, 120여 년 전 민족의 굳은 머리와 가슴을 적시며 깨어남의 길로 이끌었던 순한글 활자들의 잉크 향이 고요하고도 깊게 피어오른다.


순야옹의 시(詩)

사냥꾼의 그물을 함께 들어 올린 메추라기처럼

잠든 조선을 깨우려 찍어낸 순한글 활자여.

문자의 빗장을 풀어 만민을 품었으니

그 간절한 외침이 곧 대자대비(大慈大悲)였네.

제2전시관의 빛바랜 활자들을 가슴에 담고

무궁화 테마공원 벤치에서 보이차 한 잔을 우려낸다.

유리장 너머로 마주한 만민 평등의 그 활자들이

사월의 봄바람을 타고 묵직한 잉크 향으로 번지네.


[오늘의 법구경]

의미 없는 천 마디의 말보다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의미 있는 한마디의 말이 훨씬 낫다. (『법구경』 제8장 천 게송의 품, 100게송)


[연재 안내]

'순야(純爺)의 갈색 사유'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차 향기와 함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지혜의 문장이 당신의 주말을 포근하게 감싸 안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말,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며, 나를 비워 세상을 채우는 평온한 시간 보내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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