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브런치에 연재했던 <기자가 기사를 읽는 법>을 다시 이어서 연재합니다. 20회를 목표로 세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평화로운 편집국. 어디선가 대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 성질 머리 나쁘기로 소문난 김 부장이군요. 아침부터 뭐가 불만인지 부원을 들들 볶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도 풀, 저것도 풀. 아니, 오전보고가 전부 풀떼기밖에 없네. 이거 너무 한 거 아니냐고요."
"네, 부장. 그래도 다들 열심히.."
"이러다 초식동물 되겠어, 아주 그냥! 안 그러십니까?"
"네.."
"팀장들한테 점심 전까지 발제안 다시 올리라고 해. 정 없으면 인터뷰 붙여서 기획거리라도 만들라고. 알았지."
"넵."
풀떼기? 초식동물? 발제안? 무슨 얘기일까요.
'풀(Pool)' 얘기입니다. 기자들에게 풀은 몹시중요합니다. 모든 기자들에게 공개된 정보, 혹은 정보를 기자들에게 공개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통상 뒤에 '되다'가 붙는데, "이거 풀된 거야?" "출입처 풀입니다." "대변인이 곧 풀해준답니다." 처럼 쓰이곤 합니다. 그러니까 위 대화는, 지면 계획에 다른 매체들도 다 아는 풀기사(풀떼기)밖에 없다고 애꿎은 내근기자가타박당하는 상황인 것이죠.
풀 시스템은 흥미롭습니다. 경쟁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이 독특한 시스템은 오랜 전통과 나름의 체계, 규칙을 갖추고 있습니다. 풀기사가 중요한 까닭은 기자들이 항상 단독이나 기획 기사만 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해 세상의 모든 기사는 풀기사와 풀 안 된 기사로 나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전자가 절대 다수, 후자는한 줌이 채 되지 않습니다. 즉, '풀떼기'들 없이는 신문이나 방송뉴스를 결코 만들 수 없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풀 시스템은 쉽게 말해 기자들끼리 맺은 '전략적 제휴'입니다.
풀 시스템은 취재에 들여야 할 품을 크게 줄여주고 입에 풀칠할 정도의 기삿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꽤나 유용합니다. 어느 출입처든 출입처에서 풀한 정보는 공신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즉, 간단한 확인만 거치면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출입처마다 방식은 다릅니다. 출입기자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 대변인이나 홍보담당관이 직접 들어와서 필요할 때마다 채팅으로 확인해주는 방식, 기자단 간사가 담당자와 따로 얘기한 뒤 내용을 정리해서 단톡방에 올리는 방식, 담당자가 자기한테 전화를 걸어온 기자들한테만 내용을 알려주는 방식 등 다양합니다. 보도자료 같은 경우는 통상 한글 파일을 단톡방에 직접 올리거나 언론 담당자가 개별 기자들 이메일로 보내는 방식으로 풀됩니다.
취재진이 대거 몰리는 현장에서는 기자 한 명이 '풀기자'로 선정되기도 합니다. 투표로 결정된 한 사람이 모두를 대표해 취재를 벌이고 이를 다른 기자들에게 공유해주는 것입니다. 과열경쟁과 취재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혼란을 막자는 취지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사들은 딱히 대단할 건 없지만, 기삿거리에 허덕이는 기자들에겐 숨통을 틔여주는 가뭄의 단비입니다. 보고란이 공란인 것보다야 아무래도 심적인 부담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출입처에 따라서는 풀기사만 잘 처리해도 "일 잘한다" "열심히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풀기사들이 굵직하게 다뤄지는 청와대나 정부 부처, 법원 같은 곳이 그렇습니다. 이런 출입처들은 기삿거리가 워낙 풍부하다보니 기자단에 풀되는 기사들만 해도 양과 질이 썩 괜찮습니다.
기자들 경쟁이 박 터지는 경찰, 검찰 같은 출입처 역시 풀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다른 매체에서 단독을 썼을 때 출입 기자들은 '반드시' 그 내용이 맞는지 확인한 뒤 위에다 보고해야 합니다. 기사로 받을지(추종보도), 킬할지 판단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의 세계에서는 이같은 확인이 가능한지, 얼마나 빠른지 등이 실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마땅한 고급 취재원이 없어 사실 확인 자체가안 돼 좌절하는 기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취재력이 떨어지는 기자들은 출입처나 친한 기자들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입처에서 내놓는 공식 확인(풀)은 까다롭고스트레스 받는 절차들을 '확' 줄여줍니다.
풀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습니다.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대형 사건 같은 경우 출입처 쪽에서 먼저 기자단에 풀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기자단 간사(대표)가 출입처를 압박해풀을 이끌어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입처에서는 왜 기자들에게 풀을 해줄까요? '효율'은 좋은 명분입니다. 기자들과 출입처 모두 불필요하게 취재력과 행정력을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죠. 공식적인 풀을 통해 무분별한 오보나 가짜 뉴스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도 있습니다. 일리있는 얘기들입니다.
하지만 때로 풀에는 개인과 조직의 이해 관계가 걸려있기도 합니다. 가령 많은 수사기관들은 언론사들이 일제히 보도하는 화려한 기사들이 자기네 수사의 대미를 장식한다고 믿습니다.'특수통'이라고 불리는 일부 검사들은 수사나 기소, 재판에 유리한 내용만 주기적으로 언론에 풀하며 유리한 여론을 만들려 하기도 합니다.코로나19와 피의사실 공표 논란 탓에 없어졌다가 지난해 부활한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 티타임'은 수사 관련 풀이 공식적으로 이뤄지는곳이기도 합니다.
기관장의 승진이나 진급이 코앞인 출입처에서 유독 치적을 내세운 자료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풀은 단독 기사의 날 끝을 꺾고 힘이 떨어지게 만드는 언론 기술자들의 스킬이기도 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자단에 풀된 정보는 가치가 급락하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민감한 내용에 대한 취재, 확인 요청이 들어왔을 때 출입처 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며 풀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들한테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내용을 매만지겠죠? 때에 따라기자들이 취재 대상에 대한 확인 요청을 보도 바로 직전까지 늦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독 보도를 '찌라시'라고 풀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놀랍게도 팩트가 맞는데도 일부러 "해당 기사는 사실이 아니니 보도를 자제해주십시오"라고 풀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기사를 어떻게든 뭉개보려는 심산인 것이죠.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출입처의섣부른 풀로 이슈가 오히려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합니다.
사실 풀기사의 가치가 낮다는 것은 기자단 소속인 기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입니다. 풀은 폐쇄적인 기자단 시스템의 일원이 되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풀은 늘 엠바고(보도 통제 시점. 다음에 다시 얘기해보겠습니다)와 함께 이뤄지는데, 기자단 바깥에선 엠바고가 풀리기 전까지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습니다.중소 매체들이 기를 쓰고 기자단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같은 기자단 시스템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립니다. 누군가는 "카르텔"이라고 말하기도, 누군가는 "불가피한 제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맞다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모든 매체가 모든 출입처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질 없는 기자나 매체 탓에 불필요한 혼란만 커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모든 출입처 기자단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언론사는 생각 이상으로 적습니다.(많아야 40~50곳 정도?우리나라 언론사는 2만개쯤 됩니다.) 어쩌면 '풀떼기'에 대한 언론계 괄시와 푸대접은 배부른 자의 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