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Oct 25. 2019

나의 독서 모임 이야기.

9. 새롭게 시작하다.

Photo by �� Claudio Schwarz | @purzlbaum on Unsplash


※  독서 모임의 진정한 가치는 모임 안에서 어떠한 가치 있는 생각들이 오고 갔느냐일 것입니다. 그러나 곡식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토양을 만들고 성장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필요하듯, 독서 모임 그 자체도 바로 그러한 지적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중요한 토양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독서 모임을 만들어 가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의 독서 모임 가이드」에서 언급한 여러 형태의 독서 모임을 만들어 가면서 느꼈던 생각이나 경험들을 중심으로 적은 글입니다. 이러한 글을 쓴 까닭은 독서 모임을 새롭게 만드는 분에게는 여러 모임의 형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함에 있으며, 독서 모임 진행하거나 참여하고 계신 분은 자신과 같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봄으로써 공감을 하고 저처럼 자신의 독서 모임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의도는 이러한 몇 년간의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가치 있는 사고를 위한 독서 모임」을 만들기 위한 부단한 사고 활동에 관한 인상이나 느낌을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통해, 한 가지 바라는 점은 좋은 독서 모임을 만드는 방법보다도 좋은 독서 모임이 되기 위해 어떤 사고를 했는지를 들여다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독서뿐 아니라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을 해주셨으면 하는 게 제 작은 소망입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참고로 이야기는 오래 전의 일을 기억에 의존하여 쓰고 있기에 연재 중에 계속 수정되며 추가될 수 있습니다.


1부 이야기 -「1. 독서 모임을 접하다.」https://brunch.co.kr/@wringkle/115

2부 이야기 - 「2. 독서 모임을 만들다.」https://brunch.co.kr/@wringkle/122

3부 이야기 - 「3. 발췌와 발제의 기준을 세우다.」https://brunch.co.kr/@wringkle/131

4부 이야기 - 「4. 안정적인 장소를 얻다.」https://brunch.co.kr/@wringkle/135

5부 이야기 - 「5. 양적으로 성장하다.」 https://brunch.co.kr/@wringkle/138

6부 이야기 - 「6. 새로운 형태의 독서 모임을 만들다.」 https://brunch.co.kr/@wringkle/142

7부 이야기 - 「7. 지속성 있는 모임이 되기 위해 동아리 창단 계획을 구상하다.」https://brunch.co.kr/@wringkle/146

8부 이야기 - 「8. 난관에 빠지다.」https://brunch.co.kr/@wringkle/148




설 명절이 지나고 개강을 앞둔 시점이었을 것이다. 동아리는 어느 정도 기틀을 갖추었다 싶었을 즈음이었고 이제는 내가 없어도 후배들끼리 머리를 맞대어 충분히 일궈 나갈 수 있을 법한 모임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오로지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모임을 만들어가며 추구했던 「가치 있는 생각의 공유」라는 초기의 정신과 그에 따른 여러 가치를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해주는 것이었다. 이 생각만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이들에게 방황의 시기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이 기본 원칙이 충분한 길잡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을 어느정도 마무리 지었다 생각했을 때, 반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이미 오래 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월권이며 욕심이었다. 그곳을 나가게 된 요인 중에는 회장의 직설적인 말이 하나의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독서 모임을 비롯하여 모든 활동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것이었다. 충분한 사료를 만들어 두었기에 내가 없어도 독서 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이를 참고하면 될 것 같았다.

동아리는 그 안에서 모임의 목적과 가치를 기억하고 그것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충분히 존재한다면 계속 존속할 수 있는 일종의 법인체였다. 내가 적당한 시기에 손을 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없어도 존속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련도 없이 동아리와 관련된 모든 모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의 독서 모임이든 그와 관련된 경험은 다시 맨땅에서 해야 할 테지만, 홀가분했으며 뭔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두려움보다 앞섰다.

사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애초에 깨닫고 있었다. 내가 없더라도 모임은 운영되며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를 잊고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내는 것을 비일비재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중요한 위치에 있을 때 그곳에서 벗어나면 겉으로 볼 땐 그럭저럭 운영은 될지언정, 상황이 점점 변질되거나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작은 공동체나 한두 사람에게서 탄생한 사상이 점점 확산되면서 권력자의 나쁜 의도로 변질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많았다. 사상의 가치가 유지되느냐 마느냐는 그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초기 사상의 가치를 계승하고 바르게 발전시키려는 열정을 가진 이들이 사상이 무르익을 때까지 계속 존재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기도 했다. 예수의 사상이 바울이나 제자들에 의해 체계화되는 과정이나 소크라테스의 말이 플라톤의 책으로 정리되는 것이 그러했다.

동아리를 나오면서 한 가지 우려스러웠던 부분은 바로 이들이 이러한 가치를 계승하여 동아리를 가꿔나가며 난관을 헤쳐나갈 만한 긍정적인 열정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열정은 일종의 사명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저 취미활동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동아리 단위에서 이것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아리가 사상을 가진 종교나 정치 집단도 아니고 혹은 권력이나 이권이 달린 집단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런 정신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남아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다음 세대의 몫이었다. 동아리 단톡방에 장문의 글을 남기고 나오면서 나의 탈퇴는 일단락 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쉬웠고 홀가분한 탈퇴였다.

들려오는 소식에는 모임을 나가고 나서도 동아리는 유지되었다. 시끄러운 일들은 대체로 정리되고 아침 모임이나 주말 모임도 별일 없듯 운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잠잠해졌을 뿐이지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해결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문제였으며 앞으로의 다른 문제들이 그 위로 쌓일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이 일은 집단에 남아 있는 구성원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반전될 수 있었다. 내가 나가게 됨에 따라 회장이 좀 더 힘을 가질 수도 있었고, 나를 의식하면서 하지 못했던 긍정적인 일들이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여하튼 학교의 동아리가 된 이상 그곳을 발전시키는 일은 남아 있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시민에게는 시민 의식이, 민족과 인류에게는 시대정신이 바로 그들이 사는 사회를 바로 잡도록 단결하고 노력하는 힘이 되듯이, 이들의 정신이 이 집단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충분히 상황을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떠나는 사람은 언제나 아쉬움을 안고 떠날 수밖에 없고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떠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좋은 것을 남겨두고서 앞으로도 잘 되기를 기도해주는 수밖에 없다. 모임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는 일은 마치 애지중지하는 딸을 길러 그의 배우자에게 넘겨주는 일과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혹자는 굳이 그렇게까지 정리하고 나올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에는 수년간의 독서 모임을 정리하고 뭔가 새로운 시작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정말 컸다. 특히 모임을 하면서 수년간 꼼꼼하게 모임을 준비하던 내 성향이 때로는 괴롭기도 했는데, 모임을 위한 만반의 준비에 쏟는 시간이 너무 많아 다른 일들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이 즐거움을 주는 일이기도 했기에 그 관계를 끊지 않는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삶의 균형을 깨뜨려가며 지금도 그렇게 해왔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몇 년 동안의 삶이 내 지적 성장에 엄청나게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글쟁이로서의 꿈과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문제는 취미활동으로서의 독서 모임을 벗어나도록 한 진정한 계기이며 자립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마음을 먹게 했다.

동아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해서 바로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전에 기획해봤던 모임 중에서 해보고 싶었던 새로운 모임들을 먼저 실행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참가비를 받고 진행하는 운동 모임도 있었고 영어 회화모임도 있었다. 꼼꼼하게 기획된 이러한 모임은 운동이나 영어 실력에 관한 코칭 능력뿐 아니라 타인을 가르치게 됨으로써 더 많이 배운다는 불변의 진리를 실현하기도 했다.

독서나 운동, 그리고 영어 모임을 주도적으로 만들면서 느낀 것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힘들고 귀찮더라도 타인을 가르치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임 실행 단계 이전에 어느 정도는 꼼꼼하게 목적과 그에 따른 계획을 짜라는 점이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실행하라는 것이다. 계획을 덜 짜거나 혹은 세심하게 짰다고 해도 막상 현실에 적용했을 때에는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계획을 잘 짜 놓으면 그 타협점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계획이 없는 상태로 실행했다면 현실에 적용하는 대로 타협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 모임을 먼저 하게 된 까닭은 이러한 모임을 아침에 하게 됨에 따라서 적게나마 용돈 벌이를 할 수 있고 동시에 삶의 기준점을 잡아준다는 장점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특히 운동 모임은 매일 아침 7시에 시작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아침의 게으름을 피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지도해야만 모임이 진행되므로 나로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모임이었기에 결과적으로 반백수 상태에서도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모임을 하며 계속 지내오는 동안에도 독서 모임에 대한 욕구는 계속 생겨났다. 혼자 하는 독서도 가치 있었지만, 독서 후에 여러 사람들과의 토론과 교감 속에서 발견하는 가치도 무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공간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 있던 때에는, 아무때나 밤낮으로 그 쉼터 같은 공간에 모이기만 하면 자유롭게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던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었기에 이에 대한 갈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적인 욕구와 더불어 책 읽기의 게으름을 벗어나는 데에는 독서 모임만큼이나 좋은 게 없었다.

아마도 동아리를 나오고 1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독서 모임에 관한 욕구가 절정일 무렵에 전과는 다른 새롭고도 개인적인 모임을 기획했다. 물론 이것은 그 전보다는 독서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이 적은 모임이었다.

모임의 형태는 과거처럼 한 권의 책을 선택하여 미리 준비한 발제를 바탕으로 토론을 진행하는 형식은 아니었다. 과거의 모임의 경우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발췌 및 발제까지 완성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그 까닭은 모임을 준비할 때부터 단순히 책을 읽고 토론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학습한다는 차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발제문을 만들면서 선정 도서에서 발췌한 것보다 다른 책들에서 발췌한 양이 더 많을 때가 잦았는데, 대략 5~10권 정도의 책이나 기사, 혹은 논문 등에서 이 책과 관련 있을 부분을 찾아 발췌하고 질문을 엮었다.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주제나 소재, 혹은 질문을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통찰력을 기르는 차원에서는 좋으나 발제문을 모두 완성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까닭에 때로는 여러 일이 겹칠 때는 날을 새서 발제문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방식만큼이나 내가 열정을 다하여 독서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만큼 나만의 글을 쓰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어려움과 때때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는 현자 타임에 가까운 허탈감이나 외로움이 밀려올 때가 있었다. 그에 반해 새롭게 시작한 모임은 발제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모임의 이름은 「사적인 독서」로 그 이름처럼 각자 한 주마다 스스로 선정한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형식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토론이 없는 게 아니라, 책과 자신을 생각을 이야기 나누면서 떠오른 질문이 자연스럽게 토론 주제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당시「사적인 독서」 모집 글 中.

"알려진 기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알려진 미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는 미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들 말이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브리핑하며 -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前 국무장관》

  독서라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앎에 관한 적극적 행위입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아는 것이 왜 옳은지 근거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식의 양은 독서의 양과 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러한 독서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좁은 세계에 갇혀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는 수많은 천재와 지성인들이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세상을 그들만의 통찰로 밝혀내고 그것을 책으로 저술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책을 읽은 사람은 저자와 같은 통찰과 세상을 보는 남다른 안목을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책은 지식을 기르고자 하는 이에게는 지식 습득의 기회를 줍니다. 또한, 스스로 지혜롭기를 원하는 이에게는 올바른 판단과 합리적 선택, 창조적 혁신을 위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도 신체적, 물리적 한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볼 수 있는 양은 지극히 한정적입니다.
  어떤 책이 좋다고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책이 내게로 다가와 읽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는 누군가가 책을 선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라 책을 선택하여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있다는 사실을 이따금 잊어버리고, 내가 사는 세상과 본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진리로 여기기도 하죠. 특히 그 사상을 서술하거나 교육받은 집단이 거대할수록 또는 저술가가 유명할수록 자신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집니다.
  자신의 지식과 관점만을 두고 사물의 현상이나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오로지 그 관점으로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합니다. 이따금 내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죠. 편향적 독서 또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적 독서 편력을 지닌 사람들조차 그럴 수 있습니다.
  토론은 나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이 부딪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때로는 그것이 같은 세계에서 각자의 앎의 차이에 의해 승부(?)가 나기도 하지만, 세상을 보는 전혀 다른 관점 간의 차이로부터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더불어 토론은 그 차이나 판단의 기준점이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전개가 되는지, 또한 서로의 문제점은 없는지 점검하고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독서는 단순히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앎을 추구하는 행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뿐 아니라 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미지수'를 인정하고 탐구하는 행위입니다. 나아가 토론은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현실 안에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크고 작은 가치 판단과 합리적 선택에 이바지하는 더욱 적극적 행위입니다.

 아는 것,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
   우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세상은 언제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내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미지의 것이 언제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익은 벼와 같이 고개를 숙이게 하고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지금의 독서 토론 모임을 만든 까닭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에 대한 습득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지적 대화의 장, 이것이 바로 『사적인 독서』 모임이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그 옛날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지적 대화를 원하는 수많은 이들이 모이던 ‘아고라 광장’과 같이, 자신이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러한 모임이 잘 가꿔질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합니다.


※ 참여 방법

1. 자신이 선정한 책에 대하여 위의 질문을 숙고해 본다.
2. 책의 한 꼭지 정도를 발췌하거나 발췌한 부분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다른 글을 찾아보고 함께 이야기 나눌 질문을 만들어 본다.
3. 읽은 책과 참여 희망 의사를 아래의 연락처로 보낸다.


모임은 대체로 금요일 7시쯤에 모여 10시가 넘어서까지 진행되었는데, 즉흥적이면서도 좋은 질문을 제시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핵심적인 질문이나 토론으로 가기에 앞서서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과 같은 질문들이 선행되기도 했는데, 가령 이러한 것들이었다. 모임은 기본적으로 참여자들 스스로 주도해서 이끌어 가되, 이러한 가이드 라인을 참여자에 미리 주어 진행에 참고하도록 했다.


-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소개와 (지금까지 자신이 읽은)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 왜 이 책을 읽는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와 계기가 있는가?
- 저자는 누구인가?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목적과 의도는 무엇일까?
- 이 책은 어떤 식으로 말하는가? 또한, 이 책의 도입부 어떠한가?
- 이 책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 인상 깊은 구절이 있다면?
- 자신의 책으로부터 함께 이야기하고픈 부분에 대한 발췌 또는 질문?


이러한 매뉴얼화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에 꼬리를 잡아 좀 더 세부적이며 핵심적인 질문들을 연이어 던져나갔다. 모임은 점차 내부 구성원들에 의해 어느 정도는 정형화된 형태를 갖춰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1부, 2부의 서로 다른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1부는 대체로 한 주간의 이슈를 다루거나 여러 분야에서 의문을 품고 있던 생각들을 공유하고 이에 관해 토론하는 시간이 되었고 2부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읽은 책을 다루는 시간이 되었다.

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참여자가 늘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 자정을 넘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1부, 2부는 집중적인 독서 토론이라면 3부는 이따금 장소를 옮겨 가벼운 치킨과 맥주를 함께 먹으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모임은 내가 진행해왔던 다른 모임과 마찬가지로 녹음과 피드백을 함께 진행했는데, 녹음한 자료는 팟캐스트를 통해 송출했으며 피드백은 모임에서 이야기가 나온 다양한 책과 이야기의 출처를 찾아 정리하여 인터넷 게시판과 PDF로 공유했다.

다양한 책과 이야기의 출처를 찾는 노력은 일종의 팩트 체크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연습을 통해 토론에서 모호한 말보다 정확한 출처가 있거나 확신할 수 있는 말을 하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이 두 가지 방식은 나로서는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그 까닭은 팟캐스트를 통해서는 내가 했던 말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거나 어리석은 말들, 안 좋은 습관을 다시 접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고, 출처를 확인하는 작업에서는 근거가 없는 말을 확신하고 하는 말한 부끄러운 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덮고 싶은 부끄러움을 다시 들춰보는 행위는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나의 언어적 습관이나 표현 방식을 고쳐주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이 또한 나의 성격 탓인지 그 전 모임만큼은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자료 조사 및 관련 작업에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모임 후 자료 조사 예시
<자료는 주로 서점 사이트나 위키 백과, 심지어 나무 위키나 외국 사이트, 블로그까지 포괄적으로 참조하고 출처를 기재했다.>




모임은 약 8개월간 지속이 되었다. 이 모임을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거나 지속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보다도 다른 일들이 바빠져 이 일에 취미활동 이상의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는 게 가장 컸다. 말하자면, 모임을 준비하거나 이후 자료 조사 및 관련 작업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게 나로서는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임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임과 동시에 기존의 다른 모임과는 다른 형태의 긴장감을 줬다. 기본 4시간 정도의 모임을 진행하는 동안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고, 어떤 책이 소개되며, 어떤 대화 주제가 나올지는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즉흥적인 방식은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권의 책과 발제를 바탕으로 하는 모임에 비해서는 신선하고 꽤 창의적인 사고를 필요로 했기에 할 때마다 즐거웠지만,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했기에 당일 몇 명이 참석할지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물론 위에 몇 가지 매뉴얼화된 질문이 있지만, 즐거운 토론을 위하여 진행자로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늘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독서 모임이 2주에 한번 했던 것에 반해 일주일에 한번이라고 설정해 놓은 시간도 독서만 하기에도 너무나 빠듯한 시간이었다. 여기에 모임까지 준비하고 팩트체크까지 하려니 업무가 과거 독서 모임처럼 과중화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마 지금 이러한 모임을 다시 하게 된다면 참여 인원 관리를 투표를 통해 확실히 하고 모임도 2주에 한번 정도로 줄였겠지만, 당시로서는 문제는 인식했으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모임을 중단한 그 밖의 이유로는 이 모임을 하게 된 까닭은 그 무엇보다 나 자신의 지적인 성장을 위해서였는데, 점차 여러 사람이 오게 되면서 스스로 책을 준비해도 발표할 넉넉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진행에만 집중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이 모임의 결정적인 문제는 한권의 책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책들에 뭍어 있는 이 책의 흔적을 발견해 엮어 나가며 저자의 생각을 읽은 다른 사람과의 집중적인 토론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확장해 나가는 것인데, 이러한 부분에서 자칫 수박 겉 핡기 식의 독서 활동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다른 분들에게 자신이 읽은 책의 발언 기회를 내어주고 나면 더더욱 누군가와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나 토론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은 적거나 없을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하는 수많은 대화 가운데 발견하는 오류를 들여다보고 그에 따라 정정 발언을 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 될 때가 있었다. 수많은 토론의 주장 가운데 근거로 채택하는 사실들은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에 때로는 왜곡하거나 거짓인 경우가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녹음한 자료를 바탕으로 내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거나 때로는 왜곡되어 있을 때, 낯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대신 맡아주길 바라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맡아 진행하는 것을 다소 꺼렸기에, 어쩔 수 없이 잠정적으로 중단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8개월간의 훈련은 나중에 엄청난 성과를 가져왔는데, 개인적으로는 대화나 토론에 있어서 기본적인 기술을 배우고 대화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실수나 버릇을 줄일 수 있었고 훗날 어떠한 이유로 내가 다시 동아리로 복귀했을 때, 이와 유사한 새로운 형태의 독서 모임을 만들게 되는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후에 이런 방식의 일부를 차용하여 새롭게 만든 독서 프로그램은 독서 토론을 처음 접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정도서에 대한 강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책을 가져와 읽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훗날 동아리 인원 모두가 참여하는 핵심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가끔 이 모임을 계속 유지해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그랬다면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동호회나 가치 있는 집단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열정을 다했던 동아리처럼 자신만의 공간을 소유하며 단체로서 존재하는 모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들의 문제는 시간이며, 시간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이 문제였다. 특히 점점 더 경제적으로 궁핍해져 가는 나로서는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계속 이러한 모임에만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하는 것이 이따금 괴롭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모임으로 인하여 정신적 만족감이 높아지는 건 무시할 수 없었으나, 이따금 마음이 무너지는 날이면 이들이 과연 나의 이러한 노력의 가치를 알아주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문제였다. 모두가 함께하는 모임이며 나 역시 이들이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도움을 적잖게 받고 있지만, 모임을 하면서 들이는 시간에 따른 노력에 어떠한 대가가 필요했다. 아니면 차라리 혼자 하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당시 나는, 나의 노력을 충분히 알아봐 주고, '잘한다, 멋지다!' 이러한 말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실제로 그런 말을 들으면 손사래를 치겠지만, 인간은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 자기 목숨마저 내놓는 것처럼 그러한 존중감이 좀 더 있었더라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든 이어갔을 것이다. '내가 열심히 했으면 된 거다!, 내가 지적 성장을 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지만, 가슴 한쪽에 내 노력에 관하여 충분한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계속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을 놓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혹 그러한 존중에 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관하여 어떤 경제적 이득이라도 있어야 했다.      

고독감이 마음의 빈 곳을 가득 채울 때 이러한 것들이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내게는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혹은 그 무엇인가가 있기를 바랐다. 아마 그랬다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모임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전 13화 나의 독서 모임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