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준과 김선준
2033년 11월 24일 목요일.
김현준의 기록을 각색.
어릴 적 내게 국정원은 멋있는 곳이었다. 첩보 영화를 좋아하던 나는 국정원에 들어가면 해외를 돌아다니며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꽤나 멋진 옷을 입고 최첨단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대학교 시절, 나중에 어디에 취업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내 대답은 항상 국정원이었다. 오직 국정원을 위한 일념 하나로 스펙을 쌓았고 마침내 나는 국정원 요원이 되었다. 기뻤다. 어릴 적 항상 그리던 멋진 첩보 요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일은 쉽지 않았다.
오랜 기다린 끝에 난 첫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내가 보기에도 잘 해냈다. 나는 서둘러 나의 다음 임무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가지 임무를 진행하다가 작년에 나는 새로운 지령을 받았다. 바로 IB에 대한 조사였다. 단순한 조사가 아니었다. 잠입 수사. IB의 직원으로 침투해서 그곳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내가 어린 시절 영화에서 항상 보던 그런 임무였다.
IB는 정부에서도 주시하던 회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의 도움을 많이 받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회사를 조사하라니? 하지만 권력자들은 사실 IB를 그리 믿지 않았다. IB에 대한 연구 지원을 철회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연구하는지, 그리고 김지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파악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IB에 대해 조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나에게 임무를 준 것이었다. 아직 뭘 잘 모르는 국정원 초년생을 IB에 잠입시켜 아주 평범한 수준의 첩보 활동만 하는 것, 그게 나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였다. 생각보다 멋진 임무는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3년 동안 IB에서 회사 생활을 했다. 국정원에서 지낸지는 2년 남짓이었으니 IB에서의 생활이 더 길었다.
IB에서의 생활은 꽤나 즐거웠다. 다 때려치우고 여기서의 삶을 진짜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임무에 대한 보고는 했지만 국정원 동료들보다 IB의 동료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편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났다.
민아영. 아영은 원래 연구실에서 근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녀가 IB의 연구원이었다면 내가 그녀에게 접근한 것을 임무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임무 대상도 아니었다. 그냥 그녀가 좋아졌다. 우리는 보통의 연인처럼 연애를 했으며 아주 평범한 이유로 헤어졌다. 아니다. 사실 크게 싸웠다. 우린 서로 맞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계속 IB를 잘 다녔다. 그러다가 한심하게도 또 다른 여자에게 빠졌다.
민유진. 매일 출근할 때 만나게 되는 여자였다. 공교롭게도 아영과 같은 성씨였다. 둘이 혈연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나를 봐주지 않았다. 유진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서는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에 분노했지만 괜히 회사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켰다가 내 원래 임무를 그르칠까 봐 참았다.
그러다가 유진이 갑자기 병가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단순히 아프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동료인 가은의 반응이 이상했다.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의 행방을 찾기 위해 가은이 만든 이상한 클럽에도 들어갔다. 퇴사 클럽. 그리고 그곳에서 아영을 다시 만났다. 아영은 나를 아직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제 유진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 쿨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영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녀가 연구실 기숙사에서 봤다는 무언가.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떠올랐다. 어쩌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퇴사 클럽과는 별개로 내 나름 IB에 대해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더 부지런했더라면 더 빨리 진실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랬다면, 유진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생각 없이 IB에 적응해서 살았던 내가 미웠다. 한심했다.
조사를 하다 보니 아영과 퇴사 클럽의 멤버들이 알아낸 정보가 모두 맞았다. IB는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연구를 하고 있었고 언젠가부터 노골적으로 연구를 강행했다. 그러면서 돈 냄새를 맡은 몇몇 권력자들은 그들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최악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국정원의 팀장님에게 연락해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와 들은 이야기를 보고했다. 그러나 팀장님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국정원에서 IB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요원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 외에도 몇 명의 요원이 이곳을 조사하고 있었고 이미 결정적인 정보를 확보한 상황이었다. 하긴 국정원이 거의 신입이나 다름없는 나 혼자만 보냈다고 생각한 내가 너무 순진했다. 나는 팀장님에게 IB를 소홀히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나 팀장님은 어차피 나에게 큰 역할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한 사람. 그게 지금 내 모습이었다.
팀장님은 나에게 곧 다른 작전이 있을 예정이니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라고 했다. 내 역할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작전이라고 하니 마음이 불안했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국정원과 정부가 알았다면 그들은 분명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내가 알게 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퇴사 클럽 멤버들은 이 회사의 진실을 알리겠다며 증거 자료까지 수집하려고 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것일까? 무엇이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만든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증거 자료까지 얻었다. 이 자료를 언론을 통해 뿌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정부의 극단적인 대응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연구실에 갇혀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놈들이 탈출하여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나는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몇몇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놈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SNS에 올렸다. 놈들의 모습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자신들이 본 영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금 사태가 조용히 끝나기는 틀린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를 원했지만 혼란이 먼저 알려지고 말았다. 나는 유민에게 연락을 해서 언론사에 어제 촬영한 영상이 전달되었는지를 물었다. 유민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수영이 자료를 들고 회사로 갔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수영에게 연락했다. 수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놈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창 밖을 확인했다. 그런데 옆 건물 한 구석에 한 남자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것을 목격했다. 놈들에게 당한 사람 중 하나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시 자세히 확인하니 수영이 며칠 째 입고 있던 옷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주위를 살피며 밖으로 나갔다. 가까이 가니 정말 수영이었다. 수영은 누군가의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수영에게 괜찮은지를 물었지만 수영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를 살리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숨이 완전히 멈췄다.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죽인 거지? 나는 혹시나 싶어서 그의 핸드폰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던 증거가 사라졌다. 누군가 증거를 빼앗기 위해 그를 살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 이런 짓을 한다면 IB의 소행이 분명했다.
나는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 IB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상세히 보고 했다. 팀장님은 나에게 왜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았냐며 화를 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제 나에게는 이곳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팀장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곧 사람들을 보낼 테니 나보고 어서 떠날 준비나 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다시 주위를 살피며 이동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우선 정진우는 나와 같은 기숙사에 있기 때문에 아직은 안전한 상황이었다. 반면 가은이 있는 여자 기숙사는 위험했다. 그리고 아영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계속 걸었다. 그리고 야외 주차장 앞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유민의 차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수영의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말을 들은 유민은 큰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유민에게 어서 도망가라는 말 밖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유민을 뒤로하고 나는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가은과 아영,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여자 기숙사 주위에는 보안팀 요원들을 총을 들고 놈들과 싸우고 있었다. 보안팀 요원들의 시체와 놈들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나는 이미 사망한 보안팀 요원의 총을 들고 놈들을 향해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사격에 요원들도 놀란 눈치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들을 공격했다. 놈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총구를 뒤로 돌렸다.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방금까지 쓰러져있던 보안팀 요원이 놈들과 비슷한 형태의 모습으로 변해서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총알은 바닥나고 있었고 놈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나는 총을 버리고 여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 뛰어나니면서 혹시나 더 있을 총을 찾았다. 총을 찾을 때마다 놈들을 공격하고 다시 피하고 숨고 도망치는 것을 반복하며 나는 어느새 여자 기숙사 6층에 도착했다. 6층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무서워하고 있는 그들을 진정시켰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들을 옥상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올라가다가 10층에서 가은을 만났다. 가은은 나를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나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꽤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옥상 문을 잠그고 나는 일단 그들에게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여기 어디에도 아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혹시 내가 아영을 못 알아봤는지 확인했지만 아영은 이곳에 없었다. 아영이 걱정된 나는 아영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때, 팀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국정원 요원들 뿐만 아니라 구조대원과 군대까지 출동해서 사태를 진정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팀장님에게 현재 내가 어디 있는지 말했다. 팀장님은 곧 여자 기숙사 쪽으로 헬기가 갈 것이고 차례차례 도망치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팀장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팀장님과 통화가 끝난 후, 가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가은은 내가 평소와는 달리 용감해 보였다며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만 숙이고 혹시 아영을 못 봤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가은 역시 아영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걱정되었다. 나는 가은에게 곧 헬기가 올 테니 대피하라고 했다. 가은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헬기는 바로 도착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작은 헬기가 도착했다. 옥상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태우기엔 터무니없는 크기였지만 한 명 한 명 태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헬기가 왔다 갔다 하며 사람들을 구했다. 하지만 가은은 타지 않았다. 나는 가은에게 헬기를 타라고 했지만 가은은 다른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도 구조할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가은은 듣지 않았다.
나는 가은에게 아영을 구하러 갈 테니 이곳에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가은은 이 말도 듣지 않았다. 가은은 나와 함께 아영을 구하러 갈 것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정체를 밝히며 내가 어떻게 아영을 구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가은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하루가 지나 새벽이 찾아온 상황이었다. 나는 가은을 데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총하나에 의지하며 아주 조용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건물 아래쪽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놈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특수부대원들이었다. IB의 어설픈 요원들과는 다르게 특수부대원들은 능숙하게 놈들을 쓰러뜨렸다. 덕분에 가은과 나는 1층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무사히 끝날 것 같았다. 이제 아영을 찾기만 하면 됐다.
1층에 도착하니 팀장님이 와있었다. 나는 팀장님에게 다른 사람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나를 말렸다. 그는 자신들이 상황을 정리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나는 가은에게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따르라고 하고 팀장님을 따라갔다.
기숙사 밖에는 임시 천막이 빼곡히 만들어져 있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까 헬기를 타고 갔던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소독을 하고 있었다. 나는 팀장님에게 왜 아직 이들이 여기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팀장님은 혹시 모를 전염을 막기 위한 위생 절차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일어난 사태가 전염성이 있는 바이러스가 아니라고 했지만 팀장님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몸 곳곳을 소독해야 했다.
소독을 마친 나는 임시 격리소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 같았다.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격리소 바닥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뛰어나니고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직 아영도 구하지 못했는데…. 아직… 지금 나가야 하는데…. 나는 벽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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