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최가은의 하루

미래의 기억

by 우주 작가

2039년 11월 30일 수요일.

최가은의 기록을 각색.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찬장 안에서 언제 사뒀는지도 모르는 커피믹스를 하나 발견했다. 커피를 마시기 어려운 시절이라 이거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뜨거운 물을 부어 마셨다. 맛이 이상하다. 뱉을까 했지만 이마저도 아쉬워 결국 다 들이켰다. 속이 더부룩한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며칠 전 가져온 물품들을 꺼내서 확인했다. 총알은 거의 없었고 제대로 먹을만한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마트가 있는 곳을 다시 가봐야 할 것 같다. 물품 중에 공책이 하나 보였다. 공책을 펼쳤다. 옛 생각이 났다. 예전에는 매일 일기를 쓰는 버릇이 있었다. 보호소로 가서 우리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군인들에게 전할 때도 기억을 되짚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조사가 끝난 이후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공책에 지난 6년 간 있었던 이야기를 짧게 써보면서 예전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 해 11월. 우리가 회사에서 목격한 지옥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전체로 퍼졌다.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전 세계 어딜 가도 놈들이 보였다. 놈들을 공략하는 다양한 방법이 나왔지만 놈들은 끊임없이 발전했다. 어제의 약점은 내일의 강점이 되었으며, 최신식 무기로 밀어붙여도 놈들은 또 어디선가 나타났다. 모든 약점이 사라져도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갈수록 총알이 많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래도 싸우는데 전략이 필요했다. 인간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놈들이었기에 무조건 돌진하는 건 무모한 행동이었다.

영생을 위해서 만든 약은 오히려 인류의 생명을 무수히 앗아갔다. 정부는 그들에게 대항하고 우리를 보호하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무너졌다. 신약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으려고 일부러 김지한의 행동을 눈감아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이 한 행동의 결말을 비참하게 맞이했다. 그 해 11월로부터 2년 후, 세상은 멸망했다.

세상은 멸망했지만 인류가 망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우철의 보호 아래, 나는 전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익혔다. 놈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멸망한 세상 속의 군대에 들어가 총기를 챙겼다. 그리고 그것으로 놈들을 죽였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산 사람과도 싸워야 했다. 하루하루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의 연속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억은 집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더 이상 조우철의 보호를 받지 못할 때, 나는 정처 없이 도망 다녔다. 그리고 오랜만에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잘 계실까?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잠근 장치는 이미 망가져있어 아주 쉽게 열리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부모님의 시신이 있었다. 이미 누군가의 사격으로 죽은 상태였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는 놈들의 모습과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부모님 앞에서 울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놈들이 나타날 수 있기에 소리 내어 울지 못 했다. 손으로 입을 막은 체 나는 떨면서 울었다. 그리고 그 길로 밖에 나가 돌아다니고 있는 놈들을 셋이나 처리했다. 그리고 쓰러진 놈들 중 하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예전에 항상 인사를 드리던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이었다.

나만 슬픈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너무 많은 사람이 다시 한번 죽임을 당했다. 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우와 나는 우철의 보호 아래, 오랫동안 같이 지냈다. 여자 친구와 만나는 날만을 고대하던 그였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가족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묘연했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지만 진우는 아직 그들을 찾고 있다.

유민은 김지한의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와 수영 덕분에 IB의 실상이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미 사태가 벌어진 다음이라 왜 더 빨리 실상을 알리지 않았냐며 그녀를 탓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현장을 누볐다. 세상이 멸망한 후, 그녀는 더 이상 언론인의 역할을 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녀는 생존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동했다. 나와 진우 역시 그녀 덕분에 그녀가 만든 시설에서 한동안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유민은 2년 전, 평소에 앓고 있던 병 때문에 끝내 숨을 거뒀다. 그녀가 사라진 커뮤니티는 변질되기 시작했고 나는 진우를 비롯한 몇 명은 그곳을 나왔다.

아영의 소식은 한동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년 전, 아주 우연히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군대를 조직해서 놈들을 소탕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짧은 인사만 했을 뿐 긴 대화는 하지 않았다.

선준, 아니 현준의 소식은 정말 알 길이 없었다. 국정원 요원이었기에 그가 또 다른 임무를 수행하면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아마 그러면 아직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장유호. 연구원의 유호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정확히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에서는 연구원들을 데리고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만들려고 했다. 소문에 따르면 백신까지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그 사이 세상이 멸망해버려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연구원들은 어디선가 백신을 만들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어디선가 들렸다. 하지만 실상은 알 수 없었다. 유호가 살아있다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지 않을까?

김지한과 주혁진. 둘은 모두 체포되었다. 그리고 주혁진은 감옥에서 무언가를 먹고 괴물의 모습이 되었다.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봤는데 우리가 회사에서 탈출할 때 싸웠던 이승준의 모습과 똑같았다. 서울의 방어망이 뚫린 것은 주혁진 때문이었다. 무수한 희생을 낳고 나서야 정부는 주혁진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김지한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진 이후였다. 전국에 수배 명령이 내려졌지만 김지한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놈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김지한이 아직 어디선가 놈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멸망 이후, 김지한을 목격했다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가 모습을 대놓고 드러낸 적은 없었다. 아마 그가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김지한을 죽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가은 님. 집에 있어요?”


진우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잠시만요. 문 열어드릴게요.”


잠금장치를 풀었다. 진우가 들어왔다.


“이제 가실 거죠?”


“가야죠. 진우 님은 준비됐어요?”


“네. 긴 여행이 될 것 같네요.”


“그럼 가죠. 가는 길에 마트 좀 들렀다 가요.”


“총알은 충분해요?”


“이제 거의 없네요.”


“저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요. 괜찮겠죠!”


“이 공책은 뭐예요? 일기장?”


진우는 갑자기 내가 쓰던 공책에 관심을 보였다.


“어허, 이거 실례. 숙녀의 일기장을 보면 안 됩니다.”


나는 서둘러 공책을 그에게서 뺏으며 말했다.


“아이고, 죄송해요.”


진우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풉…뭘 또 그렇게 오버해요. 몇 년을 봐도 변하지 않네. 이 사람.”


“가은 님도 그런 것 같아요. 조금 폭력적으로 변한 것 빼고는?”


“뭐래요.”


나는 총을 장전하며 말했다.


“봐, 이렇다니깐….”


“풉… 알았어요. 알았어. 그런데 거기 확실한 거죠?”


“확실한 거는 아니고, 정황 상 맞을 것 같기도 해요.”


얼마 전, 진우는 나에게 김지한의 거처를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온 보람이 좀 있는 것 같네요.”


김지한이 이 근처에 있다면, 우리는 도박을 해볼 셈이었다. 김지한을 죽이는 것. 그를 죽인다고 해서 이 모든 일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 6년의 세월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진짜 죗값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지한을 죽이죠. 이제 가요. 진우 님 말대로 긴 여행이 될 것 같네요. 살아있다면 쉽게 죽어주실 것 같기도 않고.”


“그래요. 가시죠.”


진우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오랜 그의 습관이었다.


“진우 님!”


“네?”


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클럽 이름 기억나요?”


“클럽이요? 아.. 그 퇴사….”


“맞아요. 퇴사 클럽.”


“오랜만에 듣네요. 갑자기 왜요?”


“우리 대표님이었잖아요. 김지한.”


“그렇죠? 저는 월급은 단 한 번도 못 받았지만요.”


“우리 대표님한테 거하게 사직서나 내러 갑시다. 이제 진짜 퇴사예요.”


“사직서치고는 좀 무서운 거네요. 그래요, 그러시죠!”


“그래요. 이제 정말 떠나야 할 때네요!”


나는 문을 잠그고 진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를 지옥 같은 운명으로 몰고 간 회사에게 퇴사를 통보하러 가는 길. 그날은 2039년 11월 마지막 날이었다.



ENDing BGM


Taylor Swift - it’s time t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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