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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유 Oct 28. 2022

달리면서 울어 _ 편안한 합리화

20221017 D-21 _ 편안한 합리화


11월 6일이 3주 전으로 다가왔다. 풀코스 러닝을 앞두고 조바심에 여러 매체로 풀코스 준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데, LSD라는 연습이 있었다. 마약이 아니다. 풀어쓰면 Long Slow Distance. 긴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연습이라고 한다. 보통 부상 방지를 위해 대회 한달 전 쯤한다고 하는데 9월 중순에 하프코스를 겨우 달려낸 나에겐 꼭 필요한 연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 대회가 3주 전이나 다가 왔는데 아직 이 연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핑계거리는 많았다. 짧지만 여러 팀이 모여서 무대에서 올려야 하는 공연이 있었고 촬영과 편집 등 여러 자잘한 일들이 많았다. ‘그래. 일이 먼저지’라고 생각하는 틈에 역시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날은 무조건 LSD를 해봐야 했다. 목표한 거리를 해내건 퍼지건 이 시점의 데이터로 남은 3주를 효율적으로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 ‘다리가 잠긴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내가 뛰어봤던 이상의 장거리를 달렸을 때 다리의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어느 정도가 될지 파악과 예상을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기점으로 날씨가 급속도로 추워졌고 이 때문인지 몸도 많이 무거웠다.      


1, 그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으니까.

2. 부상위험이 커질 수가 있어. 

3. 내일하면 되지. (21일 전이건 20일 전이건.)      


 꽤 나이스한 이유가 도출되었고 나는 편안하게 합리화하기로 했다. 실제로 온도가 갑자기 내려가면 부상 위험이 커진다는 이야기는 많이들 하는 이야기다. 나는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중요한 것은 우려가 목표를 파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날의 생각이 아닌 현재의 생각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수많은 리스크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집 밖에서 있는 것보다 집 안에서 있는 것이 안전하고, 뛰는 것보다 걷거나 가만히 있는 게 부상위험에서 멀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이는 달리기를 떠나서 모든 부분에서 마찬가지이다. 시험을 포기하면 고민에서 안전해지고 직장을 안 나가면 스트레스에서 안전해진다. 사실 목표의 리스크를 던져버린다면 우리는 리스크를 피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는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안전하게만 살아서는 오히려 살아갈 수 없다. 돈 걱정 없을 삶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리스크와 직면해야 살아갈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행복 또한 리스크의 곁에 있다. 자칫 철학적(?)인 이야기로 빠진 것 같은데 나에게 있어서 이번 풀코스 또한 ‘나에게 필요한 + 나의 행복을 위한’ 리스크였다. 42.195km의 장거리를 달려내기 위해서는 무리가 아닌 이상 어찌되었든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찰나의 합리화는 그럴싸한 핑계거리를 만들어내고 나태한 자는 이 핑계거리를 이성적인 이유로 포장한다. 그리곤 시간이 지나 후회한다. 이날 컨디션이 많이 안 좋기는 했다. 하지만 이 날의 컨디션을 위해 전날에 컨디션을 관리했었다면? 안 좋았던 컨디션이라도 일단 나가서 달려보기라도 했다면? 대회의 21일 앞두고 초조한 자의 마음의 짐은 조금은 더 줄여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과거를 후회하는 자가 미래를 두고 해야할 자세는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것 보다는 후회를 등지고 과거를 만회하기 위해 의연하게 미래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틀 전 5km를 채 달리지 않고 이틀을 쉬었으니 다음 날엔 분명히 LSD를 해야 할 명분이 생겼다. 나는 이날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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