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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Jun 01. 2017

3.2.4. 비우고 채우는 시간

3.2. 진로

일을 쉬는 기간은 다시 취직을 원하는 경우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시간이 된다. 신분에 제약이 있거나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경우, 일을 쉬는 기간은 경력 상 멈춰있는 시간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비어있는 시간을 통과하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대로 그 시간을 채우며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변화해간다.


요즘 오레곤주의 농장은 Crimson clover의 빨간 꽃으로 뒤덮여있다. Crimson clover는 농작물 생산에 중요한 질소를 토양에 더하기 때문에 질소비료 대신 심어진다.


설명이 필요한 시간


몇 개월 이상 직장을 쉬고 일을 하지 않다 다시 취업을 하려는 경우, 사람들은 묻는다. “그동안 뭐하셨어요?” 하물며 1년 이상 직장에 속해 있지 않았던 경우라면 무소속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의 부담이 커진다. 이전에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일을 했어도 공백의 시간이 길어지고 자기가 일하던 분야에서 멀어져 있었다면 경력의 유통기간도 사람들의 자신감도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에서 지낸 4년 간 많은 유학생 와이프들을 봐왔던 진주 씨에 따르면, 처음에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신분의 제한과 육아의 부담으로 집에서 몇 년을 있으면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사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삶,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은 개인적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경력이라는 기준, 고용주의 관점으로 나를 보면, 바쁘고 힘들지만 나를 성장시켰던 시간들이 순간 빛을 잃는다. 나 역시 회사를 떠난 후 첫 달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공백이 하루 이틀 쌓여갈 때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러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사람들의 경험과 고민을 듣고 분석하던 어느 날 생각했다. 왜 내가 나의 시간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건가? 왜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만난 적도 없는 고용주의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는 건가?


빈 시간을 채우는 우선순위


미국에 와서 진로가 불확실해지거나 잠시 가정에 충실한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시간이 일과 공부가 아니라 생활로 채워지면, 사람들은 그 시간을 ‘놀고 있는 시간’으로 생각했다. 일과 공부가 아니면 ‘노는 것’이라는 이분법이 우리 안에 있는 듯했다. 육아휴직 중인 미소씨는 이 시간을 ‘노는 시간’으로 표현했다. “지금은 놀아요. 육아만 해요. 육아는 할 게 되게 많은데, 자기 커리어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죠.” 일이나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은 ‘노는 시간’이자 경력 상 '비어있고 멈춰있는 시간'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육아를 하는 사람들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소씨는 두 아이의 육아로 아침 7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하루를 30분 단위로 쪼개 쓰고 있었다. 취업을 원하는 진주 씨의 경우, 육아와 취업준비를 병행하며 자신을 위한 로드맵까지 가지고 있었다. “Web developer가 되기 위해 어떤 기술들이 필요하고 어느 순서로 공부해야 하는지 이런 걸 로드맵으로 만들었어요. 일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걸 배웠어요. 기술, 타임라인, 순서, 걸리는 기간이랑 이런 걸 하면 어느 수준까지 오겠다, 한 번씩 점검했어요.”


다시 채우는 시간


그리고 경력 상 ‘비어있는’ 이 시간은 비어있기 때문에 바꾸고 변화되고 채워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 역시 이 시간을 어떻게 채우고 설명해야 할지 염려했다. 하루하루 경험하는 ‘경력 상 공백의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는 진공 상태가 아니었다. 바빴던 무대에서 내려오고 물러나 멀리서 화려한 무대를 바라볼 때 내 안에는 온갖 생각과 감정이 밀려왔다. 때론 슬프기도 했고 자책도 했다. 고민의 시간인 동시에 애도의 시간이었다.


독일의 임상 철학자인 나탈리 크납 Natalie Knapp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말한다. “애도는 익숙한 구조와 구속을 해체하면서 자유를 만들어낸다”고. 그리고 “깊은 애도는 자신의 한계를 해체하고 시선을 넓히는 힘이 있다"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의 애도에 대해 말했지만, 떠나온 일, 과거의 어리석음과 실수, 내 삶의 결론인 오늘에 대해서도 애도는 필요하다. 그녀가 책에서 인용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Die Sonette an Orpheus'의 구절은 혼란을 겪으며 다시 채워가고 변화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존재하라 — 동시에 비존재적 상태를,

그대 동요하는 마음의 무한한 근원을 알라.

그대 이번만은 마음껏 동요해도 좋으리.

다 소진된, 둔탁하고, 말이 없어져버린 자연의 비축물에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에

기쁨으로 그대를 덧붙이고

그 수를 바꾸라.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및 이전 글 보기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1.2. 기대와 다른 현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1. 새로운 진로를 찾는 거대한 고민

    2.2. 현재 직장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과 저울질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2.4. 정해진 계획 안에서 살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2.5. 육아에 집중하며 향후 진로의 방향성 고민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3.1. 준비와 실행

        3.1.1.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결심

        3.1.2. 좋은 하루를 위한 노력

    3.2. 진로

        3.2.1. 진로 재설정        

        3.2.2. 진로에 대한 불안

        3.2.3. 해외에서의 신분, 면허, 언어의 제한

        3.2.4. 비우고 채우는 시간

    3.3. 가족

    3.4. 주위 사람들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월요일, 목요일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터뷰 참가자들의 이름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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