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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Jun 05. 2017

3.3.1. 부부, 동반자 혹은 희생자

3.3. 가족

부부 중 한 사람만 해외에서의 진로를 준비해왔다면 다른 배우자는 지역과 시기 등 먼저 정해진 조건에 따라 자신의 진로를 계획해야 하는 제한을 갖게 된다. 또한 해외 이주가 본인 주도의 계획이 아니었던 경우, 해외에 온 후 뒤늦게 새로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며 공백기로 인한 불안과 함께 이미 정해진 조건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자녀가 있는 경우, 해외에서 부부가 육아를 전담하게 되면서 진로가 불확실한 배우자가 가사와 육아 중 많은 부분을 책임지게 되면서 새로운 진로를 준비하고 시작할 시기를 뒤로 미루게 된다.


함께 걷는 길 © 남효진


내 삶과 진로를 바꾸는 배우자의 계획


부부나 결혼 전 커플이 같이 해외 진학이나 취업을 준비했다면, 준비하는 처음부터 시기와 지역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해외에 오는 계획을 먼저 세우고 추진해왔다면, 다른 사람은 정해진 조건에 자신의 진로를 맞춰야 하는 제약을 갖게 된다. 또 교제 중에 한 사람만 유학을 준비하다가 입학이 정해진 후 결혼을 결정하고 이주를 준비하는 경우, 그전까지 결혼과 해외 이주를 확신하지 못해 계획을 하지 않았던 상대편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이런 상황은 한국 문화에서 대부분 여자 친구들이 겪게 된다. 예를 들어, 남자 친구의 미국 유학이 결정된 후 출국 전에 결혼하기로 정하는 경우, 여자 친구는 결혼 준비, 퇴사, 해외 이사 등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면서 자기 진로에 대한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기 쉽다. 인터뷰 시점에 미국에 온 지 3개월이 되었던 은혜 씨가 이런 경우에 해당됐다. “오기 전에 결혼 준비 말고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오빠 발표가 2월 말에 나면서 회사를 사직하고 계속 결혼 준비하고. 가끔 제 진로가 걱정될 때 찾아보기는 했는데 정보의 한계가 있어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에이, 가서 보자’ 하고 결혼 준비에 치중했어요.”


사실 해외이주가 자기가 간절하게 원하는 일이 아니고 곧 닥칠 자신의 기본 미래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 해외에 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위해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기 어렵다. 그래서 남자 친구의 유학이 결정되기 전까지 미국행을 확신할 수 없었던 은혜 씨는 미국에 도착한 후 생활이 안정된 후에 비로소 자신의 진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빠는 마인드가 이번까지 지원해보고 펀딩이 안되면 그냥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겠다, 언제까지 도전만 할 수는 없으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하는 상황이어서, 제가 오빠가 되겠다 안 되겠다를 점칠 수 없는 거예요. 나도 회사를 관두고 유학 공부를 할래, 이런 상황은 안 되가지고, 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딱 발표가 나고 “어, 됐어?” 후다다닥. 이렇게 돼서 제 유학을 위한 준비는 없었어요.” 


남편을 따라가는 해외 이주가 자신에게 미칠 파급력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에도 해외에 오는 준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게 된다. 남자 친구의 합격과 함께 결혼을 결정한 혜원 씨도 처음에는 미국 생활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혼 준비를 하다 보니 바빠서 ‘미국 와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은 공항에서 들었어요. 영어나 진로 고민은 아예 없었어요. 그때 당시 5년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한국에 올 거니까 영어 공부도 하고 미국 생활도 좀 해보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오빠가 저한테 "영어공부 해라,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생각해놓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얘기했을 때 사실 무시했거든요. 미국 가면 그냥 즐거울 줄만 알았으니까. 그게 제일 후회돼요.”  하지만 ‘5년만 하자’ 던 미국 생활은 ‘가능한 한 취업을 하고 계속해서 살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남자 친구와 남편을 중심으로 계획된 해외 이주는 결국 여자 친구와 와이프의 삶과 진로를 송두리째 바꾸게 됐다. 


제약과 갈등


배우자의 계획에 따라 시간과 지역이라는 조건이 정해지면, 다른 배우자는 그 조건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최대한 애쓰게 된다. 정해진 조건은 나에게 또 다른 문을 열어 줄 수도 있지만, 내 선택 자체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패션 업계에서 일해온 은혜 씨는 자기 분야의 기회가 별로 없는 지역으로 이주한 후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면서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 위주는 없었어요. 오빠는 하고 싶은 게 명확하고 하고 싶은 분야가 뚜렷했고, 저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동기가 없어서 지역을 오빠 위주로 맞췄어요. 지금은 ‘내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나 환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죠.” 


‘미국 유학생 와이프’가 ‘나는 뭘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면, 이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는 혼자만의 일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불확실할 때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흔들린다. 동반자로 같이 왔는데 희생자가 된 듯 한 느낌이 들 수 있다. 내 불안의 원인이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한 희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면, 불안한 나는 상대가 원망스럽고 원망받는 상대는 내가 부담스럽다. 지현 씨는 불안한 상황에서 싸움을 피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저 초반에 엄청 싸웠어요. 처음 2년을 제가 집에 있었거든요. 제가 TOEFL을 독학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았어요. 제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외로우면 짜증 나고. 제가 마음이 너무 불안하니까. 제가 아무것도 없고 TOEFL도 된 게 없으니까요. 너무 불안했어요. 시간이 가는 게 너무 불안했어요.”


주디스 마이어스월스 교수 등의 연구에서, 유학생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아시아 출신 와이프들의 대부분은 남편과 가족을 위해 미국행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의 필요는 가족 내 의사결정에 중요한 기준이 됐다. 해외 이주가 자신의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에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채로 이국땅에 거주하는 한계도 감내해야 했다. 예를 들어, 영어가 부담이 되면 자신이 아프거나 자녀가 아파 병원에 갈 때 남편이 있어야만 외출이 가능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끼고 자신감을 잃기 쉬웠다. 자신의 일을 잃고 일상생활을 독립적으로 감당하지 못하면, 자신 있고 용감하던 사람은 불안하고 소극적인 사람이 됐다. 더욱이, 본국을 떠나 해외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미래의 진로에는 불확실한 변수가 많다. 현재 해외에 거주하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이것이 평생 해외에 거주하고 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공부가 끝나고 꼭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언제든 상황이 변하면 이동할 수 있는, 같은 나라 안에서 직장을 바꾸는 것 이상의 불확실성이 있다. 함께 하는 배우자의 미래도 같이 불확실해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현재 일을 멈춘 나와 새로운 진로를 준비하는 나 모두 ‘애매모호한 상실 ambiguous loss’과 ‘애매모호한 이익 ambiguous gain’을 함께 경험한다. 미네소타 대학교의 석좌 교수인 폴린 보스 Pauline Boss는  ‘애매모호한 상실 ambiguous loss’에 관한 연구에서 가족 안에서 변화가 애매모호할수록 스트레스 레벨도 높아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의 주변에는 이런 좌절과 갈등의 시간 끝에 해외생활 중 서로에게 헤어짐을 고한 이들의 얘기들이 있었다. 같은 스트레스를 겪어온 입장에서, 각자의 길을 간 사람들이 통과했을 갈등과 고통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육아와 진로


새로운 나라에서 진학이나 취업과 같이 다음 진로를 준비하는 일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국에 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직업을 이어가려는 경우 새로운 나라의 규정에 맞게 추가적인 공부와 면허 취득이 필요할 수 있다. 쉬는 시간을 가진 후 미국 또는 한국에 다시 취직하기 원한다면 취업 준비와 함께 그간의 공백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 그러나 자녀가 있는 경우, ‘미국 유학생 와이프’는 진로만 생각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세상에 부부 둘만 있는 것 같은 상황에 부부가 서로에게 더 의존적이 되고, 직장에 속해있지 않은 와이프가 가사와 육아의 많은 부분을 떠맡게 되면서 와이프는 자신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쉽다. 육아를 도와줄 다른 가족들이 가까이 없기 때문에 육아의 부담을 나누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와이프가 진학이나 재취업 계획을 유보하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경우를 다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유학생 와이프’가 자신의 진로를 잠시 뒤로 미룬다고 해도 진로에 대한 생각이나 걱정을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내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이지 계속 포기하는 것은 아니기에, 미래에 다시 추진할 진로의 방향과 이를 위한 준비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들어가는 내 삶과 진로


미국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자기 길을 다시 걷게 된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은 ‘미국 유학생 와이프’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 미국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신분으로 인한 취업의 어려움을 파악한 후 긴 시간 취업을 위해 준비해 온 진주 씨는 여전히 독립적이었다. “남편은 남편의 계획을 세우고 저는 저의 계획을 세워서 서로 안 맞는 부분은 서로 얘기해서 수정하는 편이에요. 누가 주도적으로 해가는 게 저희는 없어요.” 미국에서 어학연수와 MBA를 한 후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서 다시 미국에 온 수정 씨에게 미국은 남편의 선택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었다. “저는 어학연수도 미국에서 했고, MBA도 미국에서 했으니까 미국에 오는 게 두렵지는 않았죠. 그리고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7막 7장’이어서 유학에 대한 환상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거의 ‘미국 가야 돼’ 이런. 그래서 MBA 갈 때 엄청 좋았죠, 어학연수도 그렇고. 저는 지금도 미국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저는 우울하거나 그런 것도 별로 없고 할 게 항상 있어요, 쇼핑을 가든지 골프를 가든지 음식을 하든지.” 가족을 위해 선택한 삶이라 해도 그 시간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나로 살고 내 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함을 이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및 이전 글 보기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1.2. 기대와 다른 현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1. 새로운 진로를 찾는 거대한 고민

    2.2. 현재 직장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과 저울질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2.4. 정해진 계획 안에서 살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2.5. 육아에 집중하며 향후 진로의 방향성 고민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3.1. 준비와 실행

        3.1.1.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결심

        3.1.2. 좋은 하루를 위한 노력

    3.2. 진로

        3.2.1. 진로 재설정        

        3.2.2. 진로에 대한 불안

        3.2.3. 해외에서의 신분, 면허, 언어의 제한

        3.2.4. 비우고 채우는 시간

    3.3. 가족

        3.3.1. 부부, 동반자 혹은 희생자

    3.4. 주위 사람들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월요일, 목요일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터뷰 참가자들의 이름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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