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면 양심도 파는 자본주의
중학교 1학년 여름, 교복을 입던 나는 티브이에서 9.11 사태를 속보로 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행해진 테러사태가 6년이 지난 후 대학생이었던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미국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에 규제를 두었던 글라스 스티걸법이 폐지되면서 뉴욕 월가에서는 가치가 불분명한 채권들을 마구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저신용 고객들에게 무분별하게 팔려나갔다. 때마침 9.11 테러로 얼어붙으려던 금융시장을 구하기 위해 미국은 6%였던 금리를 1%까지 내리면서 은행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하지 말아야 할 생택을 하게 된다. 순식간에 엄청난 현금이 시장으로 풀려나갔고 이를 소비하기 위해 은행들은 엄청난 주택대출 상품과 싸구려 채권을 섞어 'now or never' 영업을 해나갔다.
당시 신용이 없는 이들에게도 대출을 해주는 상품이 있었는데 바로 '닌자 대출(NINJA Loan)'이다. No Income, No Job, No Assets. 즉 소득, 직장, 자산도 없는 이를 위한 주택대출 상품이었다. 이게 얼마나 잔인한 상품인지는 영화 빅쇼트의 한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애널리스트들이 플로리다의 부동산 시장을 분석하러 갔다 한 스트리퍼를 만나게 된다. 집값의 5%만을 내고 집을 분양받았다 말에 애널리스트들은 "집값이 오르지 않거나, 향후 이자율이 오르면 어쩔 거냐"라고 물으니 그녀는 또 대출을 받으면 된다고 대답한다. 당시 그녀는 이미 5채의 집을 분양받은 상태였다.
당시 저신용자가 대출을 승인받는 속도와 그 대출채권이 자산유동화를 통해 또 다른 금융상품으로 바뀐 뒤 팔려나가는 속도는 블랙 프레이데이 시즌 저리 가라였다. 스트리퍼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된 충격적인 케이스는 흑인의 한 가장이 대출 승인 신청을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 이름을 적고도 하루 만에 대출 승인이 난 것이다. 한국에서 전세 대출 심사 때 거진 한 달이 걸렸는데 하루도 안돼서 그것도 강아지 이름을 대출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니 얼마나 부실했는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플로리다의 주택시장 조사를 마친 애널리스트들은 서둘러 뉴욕으로 돌아와 한 일은 바로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동자산을 CDS 채권을 사는데 쓰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만약 옆 가게가 불나면 내가 보험금을 타는 것과 같다.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고 했던가? 얼마 못가 부실채권을 산 사람들은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 갚게 되자, 집값이 폭락하고 연체율은 급등한다. 자연스럽게 CDS의 가격은 로켓처럼 솟아올랐고 CDS에 풀 베팅을 한 이들은 떼돈을 벌게 된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집값 폭등으로 기준금리를 서둘러 올리지만 시중 금리는 요지부동이었고, 본인들의 뱃속에 더 이상 넣을 돈이 없을 때쯤 결국 2007년 배탈이 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만 서울 전체 주택 가구 수를 넘는 엄청난 주택들이 경매에 넘어갔고 이는 2008년 환율 급등으로 이어지면서 나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30대 직장인들의 가장 큰 걱정은 아마도 집일 것이다. 서울에 직장을 둔 이들이라면 살 곳이 없어 결혼을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아마 15년 전으로 돌아가 가능한 대출을 다 끌어 모아 미분양이었던 타워팰리스를 사는 상상을 안 해본 3040대가 없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 가격의 변화는 집을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 같다. 일반적인 소비재들은 가격이 내리는 %가 클수록 소비가 급등하게 되는데 아파트는 반대인 것 같다. 아파트는 우리의 자산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다른 소비재와 다르게 가격이 조금만 오르고 내려도 우리가 체감하는 게 달라진다. 해서 부동산 가격이 내리면 누구도 사지 않는다 (신도시들의 미분양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부실 때문에 부동산은 얼어붙고 금융시장으로 폭탄 돌리기가 시작된다.
현재 서울의 부동산을 보면 강도 높은 정부 정책으로도 부동산 가격을 잡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집값이 앞으로 오를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어도 흐름을 타지 못하는 우리들에겐 '시장은 늘 우리의 전망을 비껴간다'라는 말을 믿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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