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의 우울과 불안은 어디에서 날아들었을까
학교의 불안생산 시스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우울하다는 말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푸르름을 뜻하는 청소년이라는 말과 어두운 감정의 대명사가 된 우울이 나란히 쓰이는 이 형용모순. 그리고 이 비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하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이들이 중학생 이후부터 취미생활을 비롯한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수행에 임하는 성직자와 같은 삶을 시작한다. 수도원 대신 학교와 학원에 앉아서, 성경과 기도회 대신 교과서와 정기시험을 치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수도사의 수행과 아이들의 수험생활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수행은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지만 학교에서의 공부는 그 성과가 점수로 증명되지 않으면 그간의 금욕적 삶과 노력이 무의미한 게 된다. 때로는 최선을 다 했을 때 큰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에는 '최선을 다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학생들이 느끼는 우울과 불안의 여러 원인 중 하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도, 그렇지 않은 학생도 불안을 느낀다. 학업에 열성으로 임하는 학생들은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은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는 패배감, 그리고 지금 이 상태로는 미래가 없다는 절망감이 불안을 야기한다. 학교가 불안을 만들어내는 원리는 노력의 과정을 칭찬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있다.
상속받은 우울, 그 깊고 캄캄한 샘.
이렇게 보면 학생들의 우울과 불안은 성적과 경쟁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울은 가정환경,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담임을 맡었던 지난 10여년 동안, 우울증으로 진료를 받는 학생이 늘 한 두명씩 있었다. 그 중에는 자해를 비롯해서 심각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상담 중에 우울이 드러나면 그 이유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심각한 우울의 경우는 대부분 가정환경이 원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환경'은 한부모가정이라거나, 조부모님 아래에서 자랐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사연들은 다 다르지만 공통점은 부모님 중 누군가가 큰 상처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삶을 잘 돌보기 어려운 상황 이라는 점이다. 부부간의 문제, 경제적 이유, 학생의 비행이나 질병 등. 부모님이 상처를 받은 이유는 학생들의 수 만큼이나 다양하다. 우울한 아이들은 대부분 그 부모님들도 마음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우울은 상속받은 경우가 많다.
성적때문에 우울과 불안을 겪는 아이들도 그 원천은 대부분 부모님이다.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우울로 표출되는 것이다. 성적때문에 눈물 흘리는 학생들의 멘트에는 '부모님께 죄송해서'라는 말이 딸려 온다.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욕망을 이식받은 학생들이 우울과 불안에 빠지는 건 어찌보면 자연스럽다. 자크 라캉이 말한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정신분석학 개념이 딱 맞아 떨어지는 장면이다.
더 암울한 사실은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성적에 대한 욕망도 따지고 보면 타인의 욕망이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높은 성적에 대한 집단적 욕망을 부모님이 욕망하고, 부모님이 가진 그 욕망을 학생들이 욕망하는 모양새다.
기쁨과 우울의 샘. 친구
가족과 성적이 우울의 큰 축인 게 사실이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친구관계도 큰 몫을 차지한다. 가까웠던 친구와 관계가 나빠진다거나, 과거에 친구에게 받았던 성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한 경우도 있다. 새학년이 되었는데 새로운 친구를 만들지 못해서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학생들의 친구관계는 늘 변화한다. 가깝던 친구와 관계가 나빠지고 그것을 회복하려 하는데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몰랐던 사람보다 더 사이가 나쁜 관계가 되기도 하는데, 아이들에게는 때때로 큰 충격이다. 친구와의 갈등에 더해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험담을 하고 다닌다거나,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던가 하는 경험을 하며 상처가 쌓여가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가 자신을 욕하고 다닌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인간관계 속에서 누군가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또 다투기도 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질투와 동경, 우정과 대립이 빈번히 일어난다. 친해지고, 다투고, 화해하고.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는 인간관계의 경험들. 문제는 이런 관계의 변화가 야기하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홀로될 수 있다는 불안.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강렬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찬 아이들은 교무실에 찾아와 '머리가 아파요'라고 말한다.
교사와 의사
우울에 빠진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1시간은 우습게 지나간다. 우울의 정도가 심할수록, 그 감정이 오래되었을 수록 아이들은 그것을 길게 털어놓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교사는 이 슬픈 아이들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고, 또 공감해주면 될까? 그러면 아이들이 '저를 이해해주는 분은 처음 봤어요'라고 하며 치유될까? 천만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봄직한 이런 장면 학교에서는 연출되지 않는다.
교사의 경청을 경험한 학생은 심심치 않게 집착에 빠진다. 어른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 주는 교사는 끊임없이 매달리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찾아오고, 심지어 방과후나 주말에 전화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사가 한 아이의 말을 끝없이 들어주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그 상담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아이는 또 한번 배신의 상처를 얻게 된다. 우울에 빠진 아이에게 쉽사리 경청의 호의를 베풀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없는 경청은 사실 부모의 역할이다.
우울에 있어서 교사는 응원팀의 일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역할을 더 부여하자면 응원단장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학생을 불러 기분이 어떤 지 물어보고, 우울한 아이를 지원해줄 수 있는 제도와 예산을 찾아보는 것 정도의 역할 말이다.
다리를 다친 아이를 교사가 수술할 수 없듯이 마음에 깊은 우울을 가진 학생도 교사가 치료를 할 수는 없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병원에 갈 수 있도록 119에 신고해 주거나 병원에 데려다 주는 것이 교사가 할 수 있는 도움이다. 그리고 종종 안부를 묻고 치유를 기원하는 것이 교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일 것이다.
아이들의 우울은 그 혼자 쌓아올린 감정이 아니다. 가정, 사회, 나아가 이 세상이 쌓아 올린 우울 덩어리의 파편이 아이들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이 우울의 덩어리를 잘라내고 아이들에게 묻어나지 않도록 할 방법이 필요하다.
지금도 여러 대책들과 전문가들의 처방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우울이 발생한 이후의 대처를 위한 것이다. 우울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학생들을 둘러싼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좀더 따뜻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질 수 있는 조건들이 구비되는 것이다. 학교는 화성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한 귀퉁이에 달라붙어 있는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