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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Nov 15. 2024

난로에 장작불을 피우며

불길을 바라보며 인생을 통찰한다.

눈으로 뒤덮인 나무를

리어커에 차곡차곡 실어

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러

뒷뜰에 있는 보일러 창고로

기를 쓰고 끌고간다.


허연 눈발 뒤집어 쓴

나무를 두 도막씩 손에 쥐고

딱딱 맞부딛혀 눈을 털어내고서

보일러 창고로 휘익 내던진다.


나무로 때는 경력이 되긴 했으나

남편처럼  기계톱으로 긴 나무를

자를 내공은 없다.

아쉬운대로 기다란 짧은 것 뒤섞어가며

땔감을 난로에 쑤셔 넣는다.


 

난로에 나무를 넣을 때는

무턱대고 쑤셔 넣는것이 아니라

미묘한 스킬이 필요하다.


가는 나무를 밑에 깔고 다시 중간굵기를 넣고

 나중에 불길이 왠만하게 타오르면

굵은 나무통을 두서너개 툭툭 집어 넣는 방식이다.


나무를 집어넣는 난로의 입구는

한정되어 있으니

남편이 미리 잘라둔 나무가 바닥인날은

나무의 굵기 조절을 잘 해야만 한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가

적당한 자리에 꾸역 꾸역 들어가고

적당하게 나무가 쌓여야만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되는것이다.



화로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저 장작더미들이

저처럼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기까지

아무리 바싹 잘 마른 나무 덩이라도

나무 덩이 혼자서는 절대 스스로 타오를수 없다.


 쏘시개 더미 몇 개에

미약한 불길을 붙이고

서서히 불길이 살아날 때쯤

고만고만한 잘 마른 나무 덩이 서넛이

서로 의지하여 서로 불길을 북돋아주어야만 한다.


비로소 불길은

이 나무와 저 나무를 의지삼아 타 오르고

그제서야

쉽사리 꺼지지않는

맹렬한 불길이 솟아 오르는 것이다.


나무 덩이 서로가 긴밀하게 밀착되어 의지할수록

불길은 거세진다.

아무리

바싹 잘 마른 나무 덩이 일지라도

잠시 서로 힘이되는

나무를 벗어나 다른 나무 덩이와 간격이 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불길은 서서히 사그러져 버린다.


인생도 우리의 삶도

저 나무 덩이들과 같다.

긴밀히 서로 격려하여 북돋고

힘이 되어줄때

불길은 강하고  맹렬하게 타오르지 않던가.


그렇게 불이 붙으면

이제 솟구치는 불길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부지갱이 하나 손에 들고

난로 안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다 보면

내 정신세계는 무념무상 그 자체가 된다.


마치 도닦는 도인마냥

혹은 침묵수행하는 도인마냥

시간가는줄 모르고 불길속에 내 시선이 고정된다.

그 불길속으로

우글거리는 세상 잡다한 번뇌도

사소한 것들에 들썩이는 내 마음도

찌푸덕거리는 내 심리상태도

불길과 함께 찬찬히 타오르다가

불길이 남긴 불씨마냥 평화롭게 가라 앉는다.


남편은 아무리 추운날도

불을 지피겠노라며 난로 앞에 앉아서

나무를 때다가 그 자리에서

책 수십페이지를 읽고 나온다.

홀로 이글거리는 불 앞에 앉아

온전한 평화를 맛본 남편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창고밖에서는

북서풍에 수평으로 날아다니는

눈발횡포가 극성일지라도

불을 피우고 앉아 불길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있다.


남편과 나에게 그 순간은

초록진 오월 끝무렵

고요한 호수가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 받으며

 페이지를 넘기는 그 망중한과 다를바 없다.


살아가며 느끼는 번민과 고뇌가

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속에서 사그러진다.

그렇게 사그러지다가

결국은 고요한 평화만 남긴다는

인생의 진리도 깨닫게 다.


가만히 보니

저 불길 속에는

인생을 통찰할수있는 철학이

춤추는 불길속에는

아름다운 예술이 담겨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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