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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Jul 12. 2020

십 년 뒤, 준고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눈에 다 들어올만한 그리 크지 않은 수련장에는 흰색 상의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이들이 각자의 공간을 확보하며 빼곡히 서있다. 현관 쪽은 이제 막 배움을 시작한 수련자들이고 안쪽으로 갈수록 고급 기술을 연마한 실력자들이다. 수업 시작 전에 서둘러 온 덕에 문과 전면 거울 앞 귀퉁이 자리는 모면했지만 실력으론 사실 딱 그곳에 있어야 마땅하다.  영춘권은 유일하게 여성이 창시한 중국 무술로 적은 움직임으로 마주 선 이와 대련하며 수련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다리를 넓게 뻗을 수 있을만한 자리에서 기본자세를 반복하고 대련자와 치사오를 연습했다.


입문자들이 바르지 못한 자세를 사부님께 교정받는 동안 상급자들은 바람을 가르는 듯한 휙휙 소리와 간혹 들리는 퍽, 악 소리를 만들어내며 대련을 했다. 과연 무술다웠고 진정 무엇을 하는 듯했다. 자신감 있게 동작을 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부러웠다. 칸막이도 없이 한 공간에 머물렀지만 실력의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 감히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다만 사부님의 눈을 피해 힐끔힐끔 고수들의 동작을 엿볼 뿐이었다.


어느 주말 소파에 누워 하릴없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중국 무술 영화에 눈이 멈췄다. 한 남자가 사람 키만 한 목각에 팔다리처럼 삐죽삐죽 나와 있는 것을 이리저리 쳐내고 있었다. 드라마 추노에서 보았던 그것이었다. 연기라고는 하나 배우의 동작은 다부졌고 눈빛도 진중했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끝까지 영화를 봤다. 며칠 뒤 우연히 공중파 방송에서 '무술 고수'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는데 그곳에서 다시 '영춘권'을 만나게 됐다. 영춘권의 고수는 다른 무술자들과 대련을 하며 주로 팔만을 사용했는데 그 힘과 민첩함이 놀라웠다. 그리고 7개월에 덴마크로 입양된 후 그곳에서 13살 때부터 영춘권을 배워 고수가 된 후, 세계 곳곳에서 수련생들을 지도했다는 서툰 한국말의 사범님도 인상 깊었다.


학창 시절 유행이던 포청천과 황제의 딸도, 이소룡과 이연걸의 시리즈조차 제대로 적이 없었다. 물론 체육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견자단의 무술 장면과 사범님의 대련 장면이 잔상처럼 꼬리를 물며 따라다녔고  급기야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다다랐다. 궁금증은 쉽게 해소가 다. 한 번의 검색으로 영춘권 수련장을 찾았고 체험 기회도 얻었다. 지하철을 타고 수련장에 가며 내내 망설였지만 도착 후에는 뭐에 홀린 듯 등록을 하고 손에 도복을 들었다. 일주일에 세 번 흰색티와 펑퍼짐한 검은색 바지 그리고 고무신과 덧신 사이의 모양을 한 검은색 수련화를 가방에 넣었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한번 경험해보자'라는 처음의 생각은 잘해서 높은 등급을 가진 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으로 바뀌었다. 안쪽 자리에 당당히 자리 잡고 대등한 자들과 대련도 하고,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사형들과 스파링도 해보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겁이 많고 둔했다. 운동감각이 없다는 핀잔을 수도 없이 들었다. 몸을 움직이면 다칠 것 같았고, 분명 잘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치는 일이 무서웠다.  몸을 움직여 얻는 즐거움과 배움보다는 피곤하고 아프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운동이 좋을 리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뜀틀을 넘다  아이들 중 혼자만 넘어져 어깨에 금이 갔고,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가면 놀이기구가 무서워 친구들의 가방만 지키고 있었다. 수영과 스키는 정말 배우고 싶었는데 과정을 따라가지 못해 화만 늘었고, 어찌 잘 견딘다 싶을 때는 중요한 순간에 탈이나  운동을 포기해야 했다. 자전거는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보곤 그만뒀다. 대신 이동 수단은 필요해 운전을 선택했다. 유일하게  줄 아는 기술이자 운동이다. 대신 운전이 익숙해지기까지 10년 정도 걸렸다. 그런데 영춘권은 배워보고 싶었다. 나도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내 몸의 움직임을 느끼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왕복 4시간의 거리를 감내하며 열심히 수련장을 찾았다.


어느덧 몇 달이 지나 승급심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 그런데 걱정이 앞섰다. 수련이야 몇십 명이 같이 하는 거니 슬쩍 묻어갈 수가 있는데 시험이라 하니 낯부끄럽고 겁이 났다.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어 집에서 동작을 연습할 때면 식구들이 얼마나 박장대소를 했는지 모른다.  주먹을 쥔 팔을 90도로 접어 가슴까지 끌어올려 주먹은 하늘을 보게 하고, 무릎은 살짝 굽혀 중심을 잡고,  발 앞쪽을 바깥쪽으로 돌리며 자연스럽게 다리가 벌어지게끔 하는 영춘권의 기본자세인 '이자겸양마'를 할 때면 무술 자세가 아니라 그냥 오자 다리의 엉거주춤 같다며 실컷 놀려댔다.  그 요상한 자세는 내가 봐도 참으로 코미디 프로에서나 볼법한 장면이었다. 어설픈 옷매무새도 한몫했다. 주말에 일을 하고 있어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지만 그보다는 나의 볼품없는 자세와 동작이 심사를 망설이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부님께서 최후통첩을 날리셨다. "승급심사 보세요". 평소에 긴 말씀을 안 하시는 편이라 그 한마디가 더 매섭게 다가왔다.  


다행히 심사 당일,  참여하는 수련생들이 많았다. 에어컨이 고장 난 뜨거운 여름날 단체로 이리지리 움직이다 보니 지쳐서 숨이 헉헉 막혔지만 어찌하다 보니 어부지리로 시험을 통과하고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부님께 차를 올리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메라 고장으로 사진은 남기지 못하고 승급시험 통과증을 받아 들었다.





그날 이후 긴장이 조금 풀려서인지 눈에 익는 이들도 늘었고 동작에 자신감도 붙었다. 스스로 즐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여유를 갖게 됐다. 그러다 의욕이 앞선 어느 날 대련자와 팔목을 세게 부딪혀 수련을 하다 약한 부상을 입었다. 크게 아픈 건 아니고 살짝 불편한 정도였는데 덜컹 또 겁이 났다. '괜히 움직였다 더 다치면 어쩌지? 그러면 일도 못하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취미보단 일이 중요하지.' 수련장에 오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사실 더운 여름날 살짝 꾀가 나던 시점이라 자체적으로 잠정 휴식에 돌입했다. 그 후 한두 달의 계획 휴식은 9년이라는 시간으로 연장되었다.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게 됐을 때 가장 먼저 영춘권 수련장을 찾았다. 중국 무술이니 분명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도장을 찾는 일은 실패했고 배움의 길도 잃었다.


스파링은커녕 목인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나도 사부님처럼, 영화와 드라마의 배우들처럼 폼나게 통나무를 쳐내는 그날을 수없이 머릿속으로 그렸었지만 꿈은 이루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혼나더라도 슬쩍 목인장을 만져보기라도 할걸 그랬다는 우스운 생각도 든다.


무술을 익히고, 스파링으로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나의 마음을 잠재워 보고 싶었다. 춤은 아니지만 힘 있는 춤을 추듯 움직여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결국 제대로 된 동작 하나 하지 못해 어디서 영춘권을 배웠노라 말할 수도 없게 됐다. 하지만 수련장의 문을 연 경험은 내 마음속에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집중하던 그 시간이 끝난 후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정신의 맑음을 경험하게 됐다. 무술은 싸움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영춘권 혹은 다른 무술을 다시 배워볼 수 있을까? 아이를 조금 키운 후에는 오십에 가까워지니 다치면 어쩌나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10여 년 전에 비해 더 자주 영춘권이 매체에 등장한다. 장면을 보며 혼자 반가워하고 머릿속으로 따라 해 본다. 얼마 전에는 영춘권을 소개하는 사부님의 기사를 접하게 됐다. 그때도 나이는 정확히 몰랐지만 젊은 청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흰머리와 수염이 어울리시는, 그리고 웃는 모습이 인자해지신 중년의 모습이셨다. 중후한 모습에선 소신을 갖고 한 가지 일을 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도 풍겨졌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른다. 그때 꾀부리지 않고 꾸준히 했더라면 고수까진 아니더라도 스파링을 하며 사형들과 영춘권을 논하는 무술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뭐든 10년 정도를 하면 잘하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 막 중년의 길에 들어선 40대 초반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10년 동안 하게 된다면 노년을 준비하는 나는 아쉬움 없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십 년 뒤 나는 몇 살인가요?
현재 그 나이대에 해당되는 주변인 세 명을 찾아봅니다.

십 년 뒤의 나는 생각보다 젊지 않나요?

10년간 운동을 한다면, 10년간 외국어를 공부한다면, 10년간 한 가지의 취미를 이어간다면 고수는 아니더라도 준고수는 되지 않을까요?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롭고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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