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기간이긴 했지만 어디 멀리는 못 갔다. 이번엔 예전처럼 능동적으로 어디를 예약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기나긴 장마에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없거니와 캠핑장이나 다중이용 시설에 대한 두려움도 무시 못할 일이었다. 다만 집이랑 멀지 않은 곳에서 평소 가족과 함께 먹지 못했던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휴가 기분을 대신했다. 이번 휴가는 이렇게 끝나는 걸까? 또 그렇게 생각하자니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아침에 이 그림책을 펴봤다. 갑자기 난 어디 산속 깊은 곳으로 순간이동을 한 듯 훌쩍 기분이 묘해졌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차에 만난 오아시스처럼 내 눈앞에 널따란 자연이 펼쳐졌다.
아침이 밝았어요. 창문을 활짝 열어요.
가리어진 커튼이 첫 장을 장식하고 있다. 살랑거리는 얇은 커튼을 젖히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우리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베란다 액자가 있다. 당신의 거실 커튼을 열면 어떤 풍경이 보이는가?
나무가 많은 동네에 살고 있다. 이 동네를 처음부터 사랑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예전 살던 아파트 동에서는 베란다에서 보이는 전경이 주차장이었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사는 동은 주차장 뷰가 아닌 산과 나무가 우거진 모습이라 가만히 소파에 앉아 밖을 쳐다볼 때가 많았다. 남향이 아니어서 처음 이사 올 때는 늦은 오후까지 들이치는 뜨거운 햇살에 걱정이 됐지만 이 집에 와서는 서향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다. 늦은 오후 천천히 물드는 저녁노을을 내 거실에서 오롯이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집의 베스트는 단연 노을 맛집이라는 것.
산은 오늘도 저기 있고, 나무는 오늘도 여기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아요.
그림책에서는 인간과 집은 한없이 작게 그려져 있다. 창문을 여는 아이 모습만 독자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금 크게 그려졌을 뿐이다. 그 뒤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산에서 눈을 못 떼겠다. 그 모든 전경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사는 자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요즘 같이 사람과의 거리가 부담스러운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캠핑장도 성황이게 된 것 같지만 그마저도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텐트를 보자면 마뜩지 않다. 한적하고 여유로우며 고요한 그런 캠핑을 기대하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다.
거리는 오늘도 북적거리고, 사람들은 오늘도 서둘러 길을 걸어요.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아요.
그림책에서는 거대한 자연도 있지만 숨 막히게 복잡한 도시 모습도 보여준다. 창문을 열면 처음에 보여준 자연의 모습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더 많지 않을까. 커튼을 열어도 빽빽이 차로 들어서 있는 주자창 모습과 쉼 없이 움직이는 도로 모습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 아파트 단지라면 아이들 놀이터와 작은 공원 그리고 상가 모습이 일상적이다.
책에서는 산이든 강이든 도시든 어쨌든 그곳이 자기는 좋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이 그림책은 단순히 자연을 예찬하는 책이 아니었다. 내가 있는 곳 그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렸다. 고요하든 복잡하든 내가 있는 곳을 사랑하고 애정하고 감사하는 것이었다.
그쪽 마을은 날씨가 맑게 개었나요?
아니요. 아직 그렇지 않아요. 한 달 넘게 비만 오고 있어요. 처음엔 덥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좀 지쳐요. 이런 기나긴 장마는 참 오랜만이긴 해요.
그림책에서는 여러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듯이 보여주더니 대뜸 그쪽 마을은 어떠냐고 묻는다. 그래서 나도 답해봤다. 여기는 아직 그렇지 않다고. 언제 이 장마가 끝날련지도 모르겠다고. 마치 우리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아니면 어서 빨리 당신이 있는 곳에도 하늘이 개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그림책이 전해주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여행 한번 잘했다. 산에도 가보고, 바다도 바라봤고, 널찍한 밭도 구경했다. 그림책 속 아이들이 창문을 열고 보여준 그림은 마치 그 속으로 들어가 내가 커튼을 젖혀 온 몸으로 맞이하는 듯 느껴졌다. 거기가 휴양지면 예전에 갔던 콘도가 떠올랐고, 거기가 도시면 언젠가 갔었던 네온사인이 화려한 외국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 그림책 작가는 책의 스케치를 진행하는 중에 일본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잠시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인지 풍경 위주의 그림책이 완성되지 않았나 싶다. 작품 후기를 읽어보니 책의 의도가 내다보였다. 그리고 작가의 생각을 전하는 단 한 줄의 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 선사하고 싶은 그림책이랄까!
그때 작가에게는 지진이라는 재해가 있었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코로나와 기나긴 장마라는 지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보내는 일상. 얼마나 그런 일상이 사치였는지를 우리는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산이든 나무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사랑하는 노을 맛집을 가을이면 난 떠나야 한다. 오래된 이 집을 나만큼 사랑해줬던 사람이 있었을까? 이 집에서 볼 수 있는 산과 나무와 석양을 나만큼 가치 있게 느껴줄 사람이 앞으로 더 있을까? 처음 봤었을 때부터 좋아했던 이 집을 떠나게 되지만 거실 커튼을 젖히고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결코 오래도록 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신은 아침에 창문을 열면 뭐가 보이나요? 당신의 마을은 이제 날씨가 맑게 개었나요? 부디 모두 아무 일 없이 평온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