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2학기에 시골로 오다
살면서 종종 아주 특별하고도 우연한 만남을 경험할 때가 있다. 운명처럼 마주했던 그 소중한 만남에 얼마나 감사했던가?
영국과 인도에서 해외생활을 할 때도 그러했다. 보이지 않는 이끌림에 따라 이웃이 되었던 이들이 있다. 가족처럼 지내다가 수많은 세월이 흘러 나이도 같이 들어가는 지금까지도 깊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으니 내게는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초창기 영국 버밍엄 시절에 위아래층에 살던 시우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다정한 나의 이웃사촌으로 남아 있다. 영국에서 만난 기도동역자이자 친언니 같은 성* 사모님. 그리고 윤* 사모님과 은* 사모님. 늘 유쾌한 지원군이신 서 선교사님. 같은 동네에 살며 사랑을 부어주신 이수* 집사님. 이분들은 현재도 마음으로 내 가까이에 있는 진실한 나의 친구이자 가족 같은 분들이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정착했던 델리 사켓역이 있던 동네에 이웃으로 살던 손에스더 사모님과 송 선생님과 은* 사모님은 타국에서의 이웃이 지금까지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서로를 응원하고 축복하면서. 인도에서 허락하신 귀한 만남은 얼마나 많은지 다 나열할 수가 없다.
한국에 와서 무엇보다도 내게 운명처럼 미리 예정된 만남이 있었다. 세 엄마와 세 아이들의 기적 같은 만남이다. 2020년 9월, 우리 아이들이 5학년 2학기가 되던 때다. 한창 코로나 펜데믹으로 세상이 어수선하던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때 우리는 각각 도시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학교로 전학을 왔다. 여름 장마와 홍수로 수해가 있었던 긴 여름이 끝나갈 무렵 5학년 2학기에. 이곳에는 소문난 꽤 좋은 시골학교가 여럿 있었다.
나는 수원에서 창*는 안양, 윤*는 서울에서 내려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1학년 같은 반이 되었다. 이제 한 사람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나머지 둘 만 이곳에 남았다. 내게 그 특별한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분명 외롭고 고독한 시골생활을 했을 것이다.
나보다 어린 엄마들이었지만 속 깊고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거기에다 이곳에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공통분모까지 있어 서로를 응원하면서 의지했다.
내가 북카페를 처음 시작해서 북토크와 작가를 초대하거나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나를 찾아와 자리를 빛내주던 고마운 이들이다.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지금도 그 모든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독서모임을 시작했을 때도 같은 마음으로 책을 읽으며 생각을 나눴다. 창* 엄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든든한 동역자로 함께 하고 있다.
옛날에 잠시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고 흘리듯 하는 말에 같이 교회 다니자는 내 말을 가슴에 담은 창* 엄마, 재* 씨.
교회 예배당에서 옆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같이 예배를 드리던 날, 우리는 둘 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붉어진 두 눈을 쑥스러워하며 쳐다보았다. 그렇게 같은 순이 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더 서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점심을 못 먹으며 북카페를 지키는 날 위해 김밥이랑 유부초밥, 간식거리를 직접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다. 거기에다가 우리 강아지들을 위한 간식까지도 챙겨 와서 반려견들을 챙겨주던 그 따스한 마음과 손길에 나는 감동했다. 중성화수술을 받고 회복되지 못한 채 꽃순이 딸, 강아지 로즈가 숨을 거두던 날도 나는 울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로즈를 사랑해 주던 그녀였기에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슬퍼했다.
아이들로 인해 맺어진 끈이 내겐 너무나 특별한 선물로 주어진 셈이다. 지금도 나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 재* 씨를 기다린다. 종종 가족들이 일본으로 여행을 가는데 돌아올 때마다 선물을 한가득 안고 오곤 했다. 그 마음이 천사처럼 곱고 아름답다. 물론 얼굴까지도 예쁜 그녀다.
하나님께서 내가 시골로 들어오던 그 순간에 그녀들도 같은 곳을 향해 오게 하셨다고 믿는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수양을 올라오게 하셨던 것처럼. 비유가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렇게 주님이 예비해 주신 것만 같았다. 내가 외로울까 봐.
우리 부부의 좋은 친구, 강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청주에서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다가 혼자되시고는 교직생활을 그만두시고 명퇴와 함께 우리의 이웃이 되어 이곳으로 오셨다. 우리가 이곳에 오던 같은 시기에 선생님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빈집만 남은 고향집으로 내려오셨다.
우리는 강 선생님께서 취미로 농사지으시는 온갖 과실과 농작물을 넘치도록 받아먹는 큰 복을 누렸다. 남편과 셋이 둘러앉아 끝없이 이어지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건축을 하는 동안 반려견 장군이가 머물 곳이 없었을 때는 기꺼이 선생님 댁의 고급 강아지 집에서 월세도 내지 않고 무료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장군이를 찾아가 밥과 물을 주고, 집을 청소했다.
봄에는 선생님 밭에서 냉이를 맘껏 캐라고 하셔서 봄아낙이 되어 향긋한 냉이를 바구니에 한가득 채웠다. 그리고 선생님 댁에서 키우던 세 마리의 반려견 중에 퍼지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사모님이 키우던 아이들이라 혼자 키우기 어렵다 하셔서 우리가 입양을 했다. 그렇게 지낸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영국과 인도의 해외생활을 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시골에서 살게 된 모든 여정이 마치 보물과 같다.
5학년 2학기에 결단하고 내디딘 발걸음이 또 다른 운명적인 만남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고 보니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감격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저 허투루 만나고 헤어지는 법이 없을 테니까.
어찌 이분들 뿐이겠는가?
더 언급할 많은 이들이 내 기억 속에 가득하지만 다 꺼내어 기록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내게 보내주신 그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