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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Apr 05. 2024

숙소에 새 혼수 장만했습니다  

시골숙소 만들기 2단계 실내 꾸미기


9년 전 우리는 집 장만과 혼수 없이 결혼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취재기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로 3년간 밤낮없이 일하다 번아웃이 왔다. 남편 느린도 비영리 단체에서 박봉과 내부 갈등 등으로 심신이 지쳐있었다. 우리는 결혼식 올린 해까지만 버티다 둘 다 퇴사하고 멀리 떠나기로 했다. 1년 동안 세계여행을 하거나, 제주도 1년 살이를 하거나, 치앙마이 네이처 파크에서 발룬티어로 살아보는 등 어쨌든 결혼 후 1년은 퇴직금 루팡이 되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떠날 거니 집과 혼수 마련은 뒤로 미뤘다. 짧은 동거기간 동안 살았던 작은 월세방에서 최소한의 필요한 가전만 갖추고 살다가 떠날 생각이었다.


11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는 둘 다 퇴사를 목전에 두고 산재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늘 야근이었다. 그래도 점점 다가오는 퇴사일을 한줄기 빛 삼아 매일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출퇴근을 했다. 몸이 축나서 몸살 기운이 늘 돌고, 어느 순간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스트레스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몸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 생리가 늦어지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쌔~한 느낌이 들어 출근길에 약국에 들러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회사 화장실에서 선명한 두 줄과 맞닥뜨렸다. 외나무다리에 선 기분이었다.


퇴사는 돌릴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여행을 떠나기도 어려웠다. 임신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도 미지의 세계인데 여기에 낯선 곳으로 생계수단 없이 떠나는 건 상상만 해도 아득해지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 시기에 느린이 서울 소재의 여행대안학교 교사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나는 입덧을 여덟 달이나 하느라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서 구직은 시도조차 못했다. 자연스레 느린의 새 직장 근처로 이사를 결정했다. 이직 기간이 촉박해서 번갯불에 콩 굽듯이 전셋집을 알아보고 이사를 하고 최저가로 세간살림을 부랴부랴 채워 넣었다.


아이 낳고 나서는 남편 해외출장에 나홀로 독박육아로 허덕이느라 집을 가꿀 여력이 없기도 했고, 2년 계약기간 채우기 전에 전세사기를 당해서 '이런 마당에 무슨 혼수냐'라는 생각에 그때그때 필요한 가전들을 최저가와 할부의 콜라보로 하나씩 채워가면서 공간과 시간을 버티듯이 살았다. 인테리어? 공간콘셉트? 전체적인 무드? 따위 하나 없이 필요에 따라 최저가로 채워 넣은 가전과 가구들은 서로 맞물리지 않고 쌓여만 가는 테트리스처럼 불화하며 아슬아슬하게 공간을 잠식해 갔다.

전세사기는 당했어도 첫째 아이와의 추억이 5년이나 쌓인 곳
그래도 꽃은 못참지! 발코니 텃밭까지!
코로나 격리기간 동안 좁은 집에서 버틴 방법


오, 이게 중산층의 삶인가?


  서울에서 김천, 김천에서 고성까지 집을 옮길 때에도 처음에 산 살림살이들을 바꾸지 않고 데려왔다. 여전히 잘 기능하고 있는 것들을 구태여 바꿀 필요성을 못 느꼈고, 오래 살고 보니 정이 들기도 해서다. 그래도 고성으로 오기 전에는 미리 집 평면도를 그려놓고 가구 배치를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각자 적절한 위치를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색감을 전체적으로 통일하고 싶어서 시트지를 붙이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등의 소소한 변화를 주는 등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공간을 꾸몄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나는 내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새 집이 오고, 그 안을 어떻게 채울까 느린과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간 머리를 맞대며 이야기를 나눌수록 처음에 계획한 것보다 자꾸 예산이 늘어났다. 새 공간을 처음부터 꾸리게 되는 경험이 둘 다 생전 처음이었던 것이다. 신혼살림 장만할 때에도 몰랐었던 공간에 대한 뒤늦은 욕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앤 우드 톤을 맞추고 싶었다. 가구는 무조건 원목으로 하고 싶었다. 막상 우리 집에는 MDF가 많지만, 숙소로 쓸 이 새집만큼은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구쳤다. 문제는 둘 다 마음이 그래서 옆에서 말려줄 사람이 없었다는 점. 숙소는 불특정다수의 사람이 왔다가는 곳이어서 물건에 하자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가성비 있는 제품들로 공간을 채우라는 이웃 아주머니의 조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의 하얀 집이 참말로 작고 소중해서 우리는 결국 혼수 때도 써보지 않은 돈을 펑펑 쓰게 되었다.


원목 테이블을 100만 원 넘는 '비싼' 맞춤제작으로 가져왔다. 느린은 백색가전은 무조건 L사여야 한다며 에어컨, 냉장고 모두 L사 최신형으로 12개월 할부를 긁었다. 우리 집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살 때는 중소기업의 OEM 제품을 최저가로 검색해서 샀지만 말이다.


 "느린, 우리가 LG를 사다니 중산층이 된 기분이네 큭큭"

 "슬아야, 중산층은 아마 12개월 할부를 긁지는 않을 거야 큭큭"


숙소는 뭐니 뭐니 해도 잠자리가 편해야 하니 매트리스도 심혈을 기울여 선택했다. 우리 집은 다이소 그릇을 쓰더라도 숙소 식기는 브랜드로. 컵은 도자기스튜디오에서 맞춤제작으로. 음향기기도 스펙 빵빵한 거로. 사실 가구 하나, 물건 하나 살 때마다 일주일씩 잠못이루며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결코 충동적으로 구매한 건 아니다. 단지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서민 of 서민에게 예외적으로 허락된 '중산층'의 결단력이 행사되었을 뿐이다.  


공간도 환대도 프리미엄이고 싶다


성경 구절 '너의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나니'에 '아멘'이다. 우리는 단순히 돈만 쓴 게 아니다. 정말 가구, 소품 등 공간을 채우는 물건 하나하나에 몇 날 며칠 고민하고 마음을 써가며 정성을 다해 숙소를 꾸렸다. 시내에서 조금 먼 작은 이곳까지 찾아와 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손님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평화로운 쉼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은 소품 하나에도 작은 감동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 보니 그 마음만큼 우리가 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치의 비용을 쓴 것 같다.


우리는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마다 '왜'를 생각했다. 왜 이 가구를 선택하는지, 물건의 배치는 왜 이렇게 하는지. 우리 숙소에 이 소품, 이 가전이 왜 필요한지를 치열하게 생각했다. 때로는 서로 목소리를 높이면서까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숙소를 만들고 싶은지를 정말 매일매일 이야기했다. 누가 보면 이미 숙소 10년은 운영한 것처럼 (예비) 손님맞이할 생각을 매일매일 했다. 숙소에 미친 사람들처럼.   


 "나는 우리 숙소가 경험을 선물하는 곳이 되길 원해"

 "나는 손님이 여기에 오면 정말 환대를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어. 그냥 내가 여기서 정말 환영받는 존재구나, 하는 느낌"

 "규모는 작아도 프리미엄이 되자"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이런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고민과 대화를 멈추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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