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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야 Apr 06. 2024

당신의 언덕이 되고 싶다.

 <당신이 옳다. (정혜신)>을 읽고...



  사람의 몸무게가 각자마다 다르듯 단어에도 고유의 무게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 생각이 안 들 만큼 가벼운 단어들이 대부분이긴 하나 가끔 유달리 묵직하게 다가오는 단어가 있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공감’이라는 단어가 특히 그러하다. 어릴 적부터 난 이성주의의 색이 짙은 아이였기에 지난 내 서사에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다 재수 생활과 군복무 등 일련의 폐쇄적인 시간이 지나며 주위에 남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드는 것을 보며 과거에 빈말로라도 공감하는 척을 했다면 지금 더 많은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았다. 해당 사색 이후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회의를 느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진심 어린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 성적표를 받아 든 지금 후회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도 공감 능력이 부족한 내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자 한편으로는 ‘공감이 감정노동이라는 내 관념을 바꿀 때면 바꿔봐라’ 하는 소심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글쓴이인 정혜신 선생 본인이 정신과 의사인 동시에 상담가로 활동하며 겪은 일화와 이를 바탕으로 느낀 점을 서술해 놓은 글이다. 필자가 경험한 수많은 사연과 당시 상황에서의 대처를 자세히 기술해 놓았기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가정을 상상하며 글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이전의 어떤 책보다도 필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후에 책을 덮었을 때 보인 건 색안경을 끼고, 공감을 꺼렸던 과거의 나였고,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공감에 대한 편견을 깨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벚꽃 #노을

  공감이란 뭘까. 책을 읽기 전 기존에 내가 생각한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는 좋은 말 대잔치, 좀 더 현실적으로는 감정노동이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공감을 상대의 존재에 대한 주목과 신뢰라고 정의한다. 즉 공감의 의의는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주목받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에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성적이 오른 친구에게 단순히 “성적이 올랐네. 축하해”가 아닌 “정말 공부 열심히 했구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상대의 특성이나 부가적인 수식어에 주목하는 게 아닌 상대의 근원적인 ‘나’에 대해 집중해 주는 것이다. 이어 작가는 자신의 존재가 주목받는 그 순간이 ‘진짜 내 인생’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언뜻 봐선 나와 비교했을 때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차별성이 존재하는지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해왔던 공감이 필자가 정의하는 공감의 의의를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한 것을 보면 잘못된 게 분명함은 알 수 있다. 그 요인은 추후 책을 정독하면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화살을 쏘았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면, 막연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정을 공유하는 식의 즉각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라는 목표를 두고 질문을 통해 대답을 유도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래도 ‘당신이 옳다’라는 근원적인 신뢰를 주라는 것이다. 공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금껏 공감이라는 탈을 쓴 감정노동을 자처했으니 실은 저자가 정의하는 올바른 공감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이제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당사자든 청자든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상대의 존재를 주목하고, 조명하는 것이 정말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보다도 더 나은 길일까. 애당초 나는 왜 공감을 꺼렸는가. 공감을 하든 당하든 어쨌거나 일반적으로 공감이 필요한 상황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상황이다. 이때 위로나 격려보다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제시하는 것이 화자에게도 청자에게도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 단언했다. 다음의 신념은 ‘4장 경계 세우기’를 접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4장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국가들 사이에 국경이 존재하듯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하며 이를 잘 인식하고 반드시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 경계는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는 해당 도서보다는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카게'의 저서  <미움받을 용기> 를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철학자 :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모든 인간관계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를 함부로 침범하는 것 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오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네.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 이를테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등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아이지.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일세.  
                                                                                                -미움받을 용기 p160-    


  혹자는 이 같은 내용이 ‘앞선 질문과 어떤 관련이 있나’하고 의문을 품을 것이다. 다음의 내용을 읽다 보니 문득 ‘나름 도움을 준다고 한 이성적인 해결책 제시가 상대의 경계를, 과제를 침범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위의 내용을 내게 적용해 보면 문제의 당사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사자이기에 이는 상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은 상대가 내게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은 해결책 제시보다는 상대 존재의 주목, 즉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의 충전을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호의라 생각하고 행한 것도 상대가 폭력으로 받아들이면 그건 폭력이다. 상대와 나의 경계 구분 없이 막연하게 이성주의를 고집했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위의 내용을 통해 치기 어린 지난날을 반추하고 성찰할 수 있었다.


  이제 공감의 옳은 정의도 알겠고, 필요성도 잘 알겠다. 이후 글의 자취를 따라가다 떠오른 마지막 의문은 ‘공감의 대상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납득이 되지 않는 나의 막냇동생, 좀 더 극단적으로는 책에 나오는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유가족들에게 욕을 퍼붓던 할아버지. 이런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까지도 감히 ‘당신이 옳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이에 작가는 'yes'라고 답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처럼 필자는 공감의 주체는 타인의 행동, 생각이 아닌 그들의 감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행동, 생각과는 별개로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기 때문이다. 화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기쁠 때는 반드시 기쁠 만한 이유가 있다. 콩 심은 곳에 팥이 나진 않는다. 이후 단순히 공감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잘 적용해 평소엔 맹목적으로 비판할 당신들의 사고와 행동들을 이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책에서 제시하는 삶의 원동력이자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우리를 따라다닐 우리네 삶의 목표가 자기 존재에 대한 주목이라고 했을 때, 문득 우리나라의 경우 해당 맥락에서 참 살기 척박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본인의 강점과 상관없이 모든 과목을 잘해야 하는 수능 시스템, 인간의 당연한 감정을 가지고 모조리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묶어버리는 현대의학 등 우린 주위에서 우리를 획일화시키는 현상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많은 이들이 존재 주목의 결핍을 안고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의 존재가 주목받을 때부터가 진짜 내 삶’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 본연의 삶을 못 사는 것 같다. 우리나라가 경제적 선진국임에도 ‘OECD 자살률 1위’, ‘출산율 최저국’이라는 불명예가 그 방증이 아닌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데 여러 세계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비빌 언덕 하나 없다는 건 참으로도 슬픈 일이다. 이 시간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모든 집단에서 본인의 존재를 주목받으며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세계에서만큼은 ‘나’를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같은 흐름에서 주위 모든 이들에게 책에서 얻은 깨달음을 실행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두 명에게만큼은 어둠 속 촛불 같은 존재로 기억되고 싶다.


 '누군가에겐 내가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는, 그런 삶.'




<당신이 옳다(정혜신)>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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