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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Aug 18. 2021

다들 가을이 와서 좋다고들 하지만(feat.여름성애자)





세상을 다 태우고 끓일 것 같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 저녁으로 
끈적임이 사라진 바람이 
자기 자리를 잡으려 
내 몸을 자꾸 건드릴 때.

자기 열기에 못 이겨  
온몸을 휘청이던 
여름이 가고
아무 일 없었단 듯 어른스럽게,
서운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을이 올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무 좋다고.
이제 살 것 같다고.
가을을 탈 예정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지 
저는 이해가 안 돼요.
이맘 때가 되면 저는 초조해지거든요.
여름이 끝나면요?
가을이 되는 것까진 그나마 괜찮겠죠.
근데 가을마저도 끝나면요?
그럼 겨울이 오잖아요.
그게 뭐가 좋아요?
저는 늘 이렇게 따져 물어요.

저는 여름이 끝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토록 뜨거웠던 해변과 
그렇게나 많던  빨갛고 파란  파라솔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발가벗고 다녀도 춥지 않을 것 같던,
그래서 늘 안심이 되던 
그 열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꽁꽁 언 아이스크림도, 딱딱한 얼음도 
순식간에 다 망쳐버리던
그토록 천진한, 자기밖에 모르던 
뜨거움은 대체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엉덩이가 보일 것처럼 짧은 핫팬츠와 
어깨를 까맣게 만들던 
손바닥만한 탱크탑도 버거워
걸치고 있는 걸 다 벗어 버려도 될 것처럼 
뜨겁던 여름은 이제 없어요.
그런 차림을 하고도 아무 생각도 의도도 없이 
자신있게 큰 소리로  웃었는데
그런 웃음은 이제 없어요.

세상을 다 줄 것처럼 
우쭐하던 연인이 
죽을 때까지 쫓아올 것처럼 
자신만만하던 연인이
하루 아침에 떠난 것처럼 서글퍼져요.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을이 오는 걸 좋아하기 싫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왈패처럼 
신나게 웃으며 뜨겁게 놀아놓고
내일이 없을 것처럼 
큰 소리를 지르고 춤을 췄으면서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색깔이 없는 얌전한 외투를 걸치고 
여유롭게 웃고 있어요.
여름을 지나온 적 없는 사람들처럼 
세련되게 스카프로 목을 가려요.
얼마 전만 해도 
발가벗고 서핑보드를 타던 사람들이
그런 적 없단 듯 갑자기
멀끔한 수트를 입고 회사원처럼 굴어요.

제 옷장은 아직도 
손바닥만한 여름옷들로만 가득해요.
저는 바보 같이 
여름이 끝나지 않을 줄만 알았거든요.
그래서 색깔없는 외투도,
세련된 스카프도,
얌전한 수트도 준비 못했거든요.
따돌림 받는 기분이에요.
저는 겨울도 아닌데 벌써 추워요.
어제까지 얼음이 가득 든 
차가운 라떼를 마셨으면서
그런 적 없는 것처럼 다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웃어요.
어제처럼 활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은근하게.

이제 가을비까지 오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라고 마냥 이렇게 
화만 내고 있을 순 없겠지요.
늦게나마 이 계절에 적응하고 
얼어죽지 않으려면 
외투를 준비해야겠죠.
질서 없는 여름에 길들어 천진한 성격을,
나밖에 모르는 성격을
다른 사람들처럼 세련되게 가리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야겠지요.

하지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어요.
저는 여름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여름에 속한 사람이거든요.
사과가 익고 귤이 익어서 
사람들이 그것만 먹어도
전 끝까지 복숭아랑 수박만 생각할 거예요.
열기를 상쾌하게 식혀주던 수박을,
달콤함을 뿜으며 
과즙을 줄줄 흘리던 복숭아를
계속계속 생각할 거예요.
옷장에 가득한 색색의 여름옷도 
버릴 생각이 없어요.

다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을을, 겨울을, 또 새봄을 맞겠지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어제의 여름에 속해 있어요.
부족한 연기 실력으로 어떻게 가을을 날지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평생 가을만을 살았던 것처럼  
의연하고 무덤덤한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계속 복숭아를 떠올리며 
그리워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외로워요.

그래도 저는 계속 생각할 거예요.
온몸을 달구던 그 열기를,
모든 걸 망가뜨리던 그 천진함을,
손바닥으로 팔목으로 줄줄 흘러내리던 
그 끈적하고 달달한 복숭아 과즙을.




어릴 때부터 여름을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저에게 '여름'은 그냥 계절이기 보다 이젠 여러가지 상징이 되었어요. '여름'이라는 단어를 따라 떠오르는 것들이 많아요. 여름 같은 음식, 여름 같은 사람, 여름 같은 기분, 여름 같은 나이, 여름 같은 분위기, 여름 같은 장소. 여름이 너무 예뻐서 딸을 낳으면 '여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여름이 지나갈 때마다 마음 속에 들어있던 통통한 열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나이가 들고 들어  여름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은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요.



여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여름성애자의 투정은 그러려니 하시고, 다들 시원한 가을 기분 좋게 맞으시기를! ^^






사비나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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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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