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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Sep 01. 2021

여름 도둑 2

이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https://brunch.co.kr/@redangel619/331





2.


태오의 양말


나는 그 무렵 좀 힘들었어. 태오랑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 너도 태오 알지? 난 태오만 생각하면 목련이 떠올라. 삼 월 초 쯤? 아직은 좀 추울 때. 그때쯤 피잖아, 목련이. 내가 겨울 무지무지 싫어하는 거 알지? 끔찍하고 지루한 겨울이 거의 다 가고,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싶을 때 목련이 피잖아. 그럼 나는 이제 좀만 있음 두꺼운 옷도 벗고, 벚꽃 보러 가겠구나. 라는 생각을 늘 목련을 보면서 하거든. 폭신폭신하고 하얗고 아무도 아프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착한 꽃. 아무리 생각해도 태오는 목련꽃 같애.


그땐 바보같이 결혼을 하고 싶었나봐. 왜 나랑 어울리지도 않는 그런 게 하고 싶었는지 몰라. 그냥 일하기가 싫었나봐. 다들 하는 거 보니, 나도 해야 되나? 그런 나답지 않은 생각들도 있었고. 갑자기 방학이 끝난 것처럼 정색하고 결혼 하는 애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나봐. 너도 그때 결혼했잖아. 너 때문에 이상한 배신감 같은 것도 느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웃겨. 뭘 그런 걸 잘해 보려고 했나 싶구. 그땐 몰랐어. 사람마다 계절이 흐르는 속도가 다른 걸.


결혼을 해야겠다 하고 옆은 보니 떡하니 태오가 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태오도 결혼 같은 건 안하는 게 좋을 타입이야. 우리는 그런 것까지 똑같이 닮았지. 나랑 닮은 태오랑 결혼은 아니다 싶어 태오를 떼놨어. 다행히 핑계 거리가 여러 개 있어서 나는 아주 당당하게 태오랑 헤어졌지.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아. 그래야 날 다시 찾을테니까.


이런 말을 써 놓고 태오가 내 집에서 자기 짐을 다 가지고 나갔던 날이 생각나.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렇게 비장하게 폼을 잡고 나가면서 태오는 양말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어. 풉. 내가 사랑하는 태오의 빈틈이야. 근데 그땐 그런 빈틈 같은 건 없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나봐.


으휴 이 칠칠맞은 새끼.


하면서 한참 웃다가 끝내는 울었어. 양말을 떨어뜨리고 가고 나서도 태오는 몇 번이나 다시 연락을 해대더니,


지금처럼 늘 사랑받아.


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어.


그런 말을 하는 태오를 내가 어떻게 쉽게 잊겠어?



물개의 커튼


마침 이사를 갈 참이어서 다행이었어. 그 집 방바닥을 보며 태오가 떨어뜨리고 간 양말이나 지금처럼 늘 사랑받아 같은 말을 떠올리며 웃다가 우는 걸 자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이사 간 집은 원래 살던 집 근처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이었어. 그때는 그 집이 참 마음에 들었어. 하얀색 벽지에 라임색 타일. 변기랑 세면대랑 샤워부스가 따로따로인 것도 좋았고. 집 전세금으로 돈을 거의 다 써서 돈도 없었는데 괜히 스스로를 위로한답시고 할부로 하얗고 깔끔한 가구와 세간들을 사 들였어. 아이보리색 린넨에 같은 색깔로 꽃 자수가 놓인 커튼도 샀어. 내가 햇볕 받는 거 무지 좋아하잖아. 커튼을 쳐 놔도 해가 은은하게 드는 게 좋아서 두껍지 않은 린넨으로 고른거지. 난 지금도 암막커튼은 싫어해. 한번씩 호텔 같은 데서 암막커튼 치고 있으면 암실에 갇힌 쥐가 된 것 같애. 별루야. 근데, 커튼을 달려고 보니까 혼자서는 안 되겠더라구. 나 그런 거 잘 못하는 거 알지? 아무래도 누구한테 부탁해야겠다 생각할 때


물개가 생각이 났어.


동호회 이름이 물개라서 어쩌다보니 끝까지 걔를 물개라 불렀어.


나 이사와서 커튼 봉 달아야 되는데 혹시 좀 도와줄 수 있어?


라고 카톡을 보냈지. 물음표를 찍자마자 1이 삭 사라지더니 물개가 칼답을 하더라.


당연하지.

그럼 이번 주 수요일 어떼? 술도 사줄게.

우와 진짜? 나 완전 잘 달 수 있어.


그리고 그 주 수요일 저녁. 처음으로 물개가 우리 집에 왔어. 그리고 처음으로 좀 주의 깊게 걜 관찰했지. 태오보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어. 머리가 작아서 실제 키보다 더 커보이는 느낌? 피부색이 딱 건강해 보일 만큼 가무잡잡 했고 머리카락이 새까맸어. 쌍꺼풀없는 눈, 남자치고는 작은 코. 눈이랑 입 사이, 그러니까 코가 짧아서 어려보였어. 웃을 땐 늘 활짝 웃었는데, 눈가에 자연스럽게 주름이 져서 그게 참 이쁘더라. 보조개도 있었어.


물개는 그 동호회 사람들 중에서도 수영을 꽤 잘 하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깨가 크고 허벅지가 두꺼웠어. 냉정과 열정사이에 보면 아오이란 여자가 마빈이라는 남자의 허벅지를 좋아하거든? 그걸 읽었을 땐 고등학교 때라, 무슨 남자 허벅지를 좋아해? 했었는데. 물개랑 친해지고 알았지. 물개의 몸 중에서 젤 이쁜 데가 허벅지였거든. 그날은 바지에 싸인 허벅지만 봐서 사실 잘 몰랐지만.


깨끗하고 단정했어. 전체적인 인상이. 오피스텔 건물 일층에 작은 맥주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날 처음으로 물개랑 술을 마셨어. 목소리가 좋았어. 낮고 조용한데 늙지 않은. 지나치게 남성적이지 않고 아직은 소년같은 그런 말투.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어린 친구 하나가 생기려나 했어.


아직은 상대를 좋아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호감 정도만 있는 상태에서 나를 먼저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을 보는 기분 알아? 뭐랄까. 판돈이 여유로워 몇 번이나 져도 괜찮은 도박판의 놈팽이처럼 나는 자신만만했어. 질 것 같지도 않았지. 팔짱을 끼고 구경한 물개는 귀여웠어. 혹시라도 내가 자기를 싫어할까 내가 자기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도 하나도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지. 어디까지 참아줄 수 있나 그 선을 짐작하고 아슬아슬 넘나들며 나는 물개랑 많이 친해졌어.


누나는 거의 내 이상형이야.

네 이상형이 뭔데?

미즈하라 키코 알아?

알지. 지드래곤이 좋아죽는 여자애.

난 그런 느낌이 너무 이뻐. 그런 얼굴이랑 그런 몸. 특히 단발머리. 누나가 딱 그런 느낌이거든. 근데 누나가 더 귀여워. 애기 같구.

까불고 있네 ㅋㅋㅋ


듣기 좋았어. 난 지드래곤 여친들은 다 좋더라구.


야 근데 누나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그렇게 생긴 여자애들이 착하진 않아.

누나는 착하잖아.

야 너 나한테 그런 거 기대하지마. 그렇게 생긴 애들은 조심해야 돼.


여름 초입이었어. 봄이 다 끝났는데도 나는 목련 같은 태오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태오한테 지금이라도 연락하면 금방 올건데. 연락할까. 연락할까. 그렇게 고민만 하면서 시간이 가고 있었지. 물개랑 그렇게 친구처럼 느슨하게 지내면서 아는 언니들이나 친구들이 소개해 주는 남자들도 많이 만났어. 상대를 골라서 사랑할 만하다 싶으면 사랑해보는 흔한 내 또래 여자들처럼. 그렇게 꽤 오랫동안 지냈어. 그러면서 물개랑은 계속 더더 친해졌어.


태오를 사랑한 건 다 진심이었는데, 헤어진 건 거짓말이었어. 근데 그때 만난 남자들은 만날 땐 다 거짓말이었고, 헤어질 때만 진심이었어. 물개만 빼고.


거짓말 하는 게 재미가 없었던 건지  물개를 만날 때는 지나치게 솔직해졌나봐. 요즘 사귈 것 같은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 직업은 마음에 드는데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 지난 주에 소개팅 했던 남자랑 계속 연락 중인데, 말은 잘 통하는데 덩치가 작은 게 좀 싫다. 이런 얘기들을 마구마구 했어. 그런 걸 그 애가 무지 싫어했고, 내가 선을 넘어서 그애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건, 그래서 그 애가 내 관상론을 믿고 내가 못된 애라고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어. 여름 옷을 입고 다녔지만 나는 그때까지 혼자 봄이었나봐. 눈 앞에 가까이 온 여름은 못 보고. 막이 내렸다가 다시 올라가고 배경도 다 바꼈는데 대사를 다 까먹어서 주춤대는 배우처럼, 한참을 둘러보고서야 알아차렸어. 내게 다른 계절이 시작된 걸.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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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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