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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지망생 Mar 06. 2016

소설 쓰기, 왜 어렵나

기사 체를 버리자

기자가 많다. 기자 지망생도 많다. 소설가도 많다. 소설가 지망생 역시 많다. 그러나 교집합은 적다. 기자 출신 소설가는 드물다.


기자 출신 소설가는 누가 있나. 이병주, 김소진, 김훈, 최근 뜨는 장강명...얼핏 생각나는 건 요 정도다. 찾아보면 더 나오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소설 써서 먹고 살기란 쉽지 않다. 영어권이라면 좀 낫겠지. 영어 인구가 워낙 많고, 또 영미권은 독서 인구의 비율도 높은 편이니까. 하지만 한국어 독서 인구는 작가를 먹여 살리기엔 턱없이 적은 규모다.


그러니까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 소설가 지망생이 택하기에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게 기자다. 글을 다루는 직업이고, 소설의 재료를 찾기도 쉽다. 실제로 기자 지망생 가운데는 늘 소설가 지망생과 정치인 지망생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해진다. 기자 출신 소설가는 왜 그토록 적은가.


습작을 해보니, 이유가 선명히 떠오른다.    


첫째는 이야기 구성 능력이다.


기자들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전달한다. 반면, 소설가는 없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백지 상태에서 인물과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물과 사건이 주어져 있는 조건에 익숙한 기자들에겐 낯선 도전이다. 늘 남이 차려준 밥상만 받던 사람이 직접 요리 하겠다고 나선 격이다. 사건과 인물을 창조하고 이야기 얼개를 짜는 힘을 키워야 한다.


둘째는 오만이다.


인터넷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 하면, 근자감쯤 되겠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뜻이다. 기자들 중에 의외로 글을 잘 못 쓰는 사람이 많다. 글쓰기 유형이 고정돼 있는 탓이다. 기자가 쓰는 글이란, 스트레이트, 해설, 르포, 인터뷰, 칼럼이 전부다. 각각의 형식도 엇비슷하다. 그 유형에 적응하고 나면, 새로운 글쓰기에 굳이 도전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 근육이 퇴화한다.


한국 언론 문화 탓도 있다. 거의 모든 언론사가 '좋은 글'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글을 잘 쓰는 기자보다는 취재를 잘 하는 기자, 인맥이 좋은 기자를 더 높게 친다. 권위적인, 공격적인, 마초적인 언론 문화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기자가 작가로 성장하기 어려운 문화다.


그런데 기자들은 이런 현실을 잘 모르거나 무시한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최고 전문가라고 여긴다. 우리 주변의 전문가, 지식인 집단이 글을 잘 못 쓰는 것도 한 원인이다.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들조차 글을 제대로 못 쓰는 걸 자주 보니까, 기자 역시 글을 잘 못 쓴다는 걸 종종 잊는다. 또 자신들에게 익숙한 유형에 맞춰서 다른 사람의 글을 재단하다보니, 글쓰기가 만만해 보인다. 이런 기분에 취해 있는 동안, 글쓰기 근육은 흐물흐물해진다.


셋째는 문체다.


기자들에게 익숙한 문체가 있다. 무조건 두괄식으로 쓴다. 문장은 되도록 짧게 쓴다. 복문, 장문은 안 되고 단문만 써야 한다. 기사에 최적화된 문체다. 신문 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그러니까 글의 주제를 앞에 배치해야 한다.


기사를 공부하듯 읽는 사람 역시 없다. 기사는 훓어보는 글이지, 밑줄 치며 읽는 글은 아니다. 그러니까 문장이 짧아야 한다. 문장이 길면, 읽기 어렵다. 평균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단어는 7개 안팎이라고 한다. 일곱 단어 이상으로 구성된 문장은 한눈에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 잠시 멈춰서 머리를 굴려야 한다. 독자를 귀찮게 하는 기사를 내는 매체는 안 팔린다. 모든 기자들은 이런 충고를 들으며 일을 배운다. "문장은 짧게 끊어서 써라."


문제는 이런 문체가 소설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사와 소설은, 읽을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글에 대한 기대도 다르다. 소설을 읽을 때는 좀 더 긴 시간을 투자할 각오를 한다. 심지어 돈도 낸다. 기대치가 높다. 약간 긴 문장도 감수한다. 단문으로만 채워진 글은 숨가쁘다. 그 호흡으로 책 한 권 분량을 달려갈 수는 없다. 이문열은 소설을 쓸 때, 단어 수를 세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문장의 길이를 조절하는 것이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자기 리듬에 맞춰서 배치한다. 독자가 책 한 권을 뚝딱 읽어내게끔 하는 힘은 그 리듬에서 나온다. 이문열은 내가 몹시 싫어하는 작가다. 그러나 그의 충고는 기능 면에선 확실히 쓸모가 있다.


기자들은 긴 글을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리듬에 맞춰 배치하는 연습도 못 해봤다. 문장을 짧게 끊어 쓰는데만 익숙하다.


'두괄식 강박'은 더 큰 문제다. 핵심 메시지를 글의 후반부에 배치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기자들이 많다. 이런 강박을 버리지 않으면, 소설은 쓸 수 없다. 결론을 맨 앞에서 보여준 소설을 누가 끝까지 읽겠나.


넷째는 꼰대 근성이다.


예전에 '일진 놀이'라는 글이 기자 사회에서 화제가 됐었다. 일진(선배 기자)이 수습 기자들을 다그치는 장면을 약간 과장해서 묘사한 글이다. 수습 기자들이 피자를 시켜 먹었다. 선배가 그 사건에 대해 보고하라고 한다. 수습 기자들은 '육하 원칙'에 맞춰서 자기들이 피자 시켜 먹은 사건을 보고한다. 하지만 빠진 대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 선배 기자가 꼬치꼬치 따지면서 수습 기자들을 다그친다. 이런 식이다.


"저희가 배 고파서 피자를 한판 시켜 먹었습니다."


"그런 식으로밖에 보고를 못해. 그거 어디 피자야?"


"도미노 피자입니다. 메뉴는 @@피자입니다."


선배 기자는 이런 대답에 만족 못 한다. 질문이 쏟아진다.


"보고가 왜 그따위야. 몇 시에 주문해서 몇 시에 도착했어?"

"누가 피자 시켜먹자고 했어?"

"돈은 누가 냈어. 걔는 왜 돈이 많대?"

"배달이 왜 늦었대?"

"배달원은 나이가 몇이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이런 식으로 질문이 끝없이 쏟아지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기자의 취재, 그리고 기사 작성이 대개 이런 식이다. '육하 원칙'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여섯 가지 요소를 전부 파악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그리고 그걸 기사에 전부 담아야 한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박살이 난다.


예전에는 '육하 원칙' 강박이 기자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이라고 봤다. 지금은, 약간 다른 생각을 해본다. 기자의 책임감일 수도, 언론 기업의 서비스 정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 약간의 꼰대 근성도 섞여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다. 독자를 아이 취급 하는 태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육하 원칙' 가운데 한두 가지를 생략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런 경우까지 '육하 원칙'을 지키려 한다. 거의 강박 수준이다. 그 배경에는, 독자를 아이 취급하는 꼰대 근성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기사 쓰기에선 그래도 된다. 하지만 소설 쓰기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모든 사건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시시콜콜하게 설명한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설명보다 묘사에 더 의지한다. 설명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용기. 독자의 이해력에 대한 믿음. 기자 출신 소설가 지망생에게 부족한 점이다.




소설가 지망생 입니다. 한동안 몸살 감기에 시달리느라 글을 거의 못 썼습니다. 몸이 회복되서 다시 글을 씁니다. 다들 감기 조심 하셔요.



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여섯 번째 이야기 : "그 활로 나를 쏘거라"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아홉 번째 이야기 : "죽은 왕은 알에서 태어났소"

열 번째 이야기 : "우리 자식들 대신 그들을 묻읍시다"



소설 '내 남자친구는 북한 간첩'


<1> 내 남자친구는 북한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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