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알을 품은 섬> 주인공 이야기
나이 마흔 넘은 소설가 지망생입니다. 어쩌면 희귀한, 혹은 한심한 사람일 겁니다. 사십 대 나이의 ‘지망생’이라니….
분명히 십 대, 이십 대 시절에는 소설가 지망생이 아니었습니다. 과학자, 공학자 지망생이기도 했고, 뜬금없는 몽상에 빠지기도 했지만, 소설 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확실히 없었죠. 그런데 중년의 애 아빠가 된 지금, 소설가 지망생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요?
돌아보면, 참 많은 계기가 있습니다. 그중 한두 가지만 없었어도, 저는 지금 다른 꿈을 꾸고 있을 겁니다.
그중 한 가지 계기를 적어보렵니다. 지금 습작 중인 글과도 관계가 있거든요.
중학교 3학년 때 전교조 해직 사태를 겪었습니다. 저희 학교에 전교조 교사들이 많았죠. 학교 근처에 전교조 서울지부 사무실이 있었고요. 영등포 산업선교회가 있던 성문 밖 교회에 걸린 현수막을 보며 등하교를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1987년 6월 항쟁이었고요. 저희 집은 전형적인 TK 출신인데, 부모님 몰래 김대중 후보의 보라매공원 유세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것 같아요.
마르크스주의나 진보적인 사회운동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고등학교에 간 뒤엔 열심히 입시 준비만 했었죠. 가만히 보니, 이른바 운동권 책 저자들도 대부분 학벌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대학 가는 게 우선인가 보다 했습니다. 운 좋게 합격을 했고, 겨울 방학 때 작심하고 마르크스주의 관련 책을 읽어봤어요.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이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내가 머리가 나쁜 건가, 내가 무식해서 그런 건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배경지식을 쌓겠다고 이런저런 책을 한동안 열심히 봤죠. 머리 나쁜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무식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어떤 한계는 넘지 못했습니다. 단지 이론적 한계만은 아니었어요. 예컨대 대학 신입생 독자를 겨냥한 진보적인 사회과학 책들은 대개 유형이 비슷했습니다. 우선 읽기 쉽게 씁니다. 실제로도 읽기가 쉽고, 또 그걸 머리말부터 강조하죠. 이건 무식한 사람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이다, 라고요. 그런데 정말 쉬운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어요. 쉽다는 건, 읽는 동안 의문이 일지 않거나, 의문이 생겨도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자연스레 풀린다는 뜻일 텐데요. 그렇지는 않았거든요. 의문은 그저 쌓이기만 했습니다.
저를 괴롭힌, 가장 큰 의문은 이거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걸 알기 위해 굳이 두꺼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어요.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죠. 다만 그걸 논리적으로 풀어내느냐, 그렇지 않으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직업적인 사회과학 연구자가 될 게 아니라면, 이런 차이는 의미가 없어요.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래,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치자. 막연하나마 대안도 있다고 치자. 자본주의를 없애고 대안을 실현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 내가 그걸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런 목표가 실현된다는 보장도 없잖아. 살아 있는 동안에 실현될 수 없는 목표라면, 그걸 위해 살아가는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과연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할 자신이 없거든. 그런데 왜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입은 불행과 손해는 누가 보상해주나. 기왕이면, 불행보다 행복을 쫓겠다는 게 큰 잘못은 아니잖아.’
결국 이런 겁니다. ‘'A'가 옳다.’ ‘'A'를 해야 한다.’ 이 두 명제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하다는 거죠.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실제로 고민하는 문제는 후자입니다. 어떤 게 옳은지를 놓고 고민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뭐가 옳은지는 이미 알고 있는데, 왜 내가 그걸 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하죠.
그런데 진보적인 사회과학 책을 읽어보면, 자본주의가 나쁘다고만 합니다. 그렇게 나쁜 걸 없애는, 옳은 일을 왜 하필 내가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풀어주는 내용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어요.
황당한 건, 진보적인 이념 서적들이 걸핏하면 ‘실천’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정말 ‘실천’을 위한 철학이라면, 무엇이 옳은지를 설명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되겠죠. 왜 손해를 무릅쓰더라도 옳은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설득해야 할 겁니다. 속물적인 기준에 비춰서는 바보짓이지만, 그래도 옳은 일에 나서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해야 할 겁니다.
안타깝게도 대학 1, 2학년 때 읽은 책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늘 아쉬웠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맹자>를 만났어요. 말 그대로 정말 우연이었는데요.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습니다. <맹자> 도입부의 유명한 대목.
"왕이시여, 왜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어짊과 올바름이 있을 뿐입니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정말 강렬한 문장이었어요. 제가 대학 다니던 1990년대 분위기가 딱 그랬죠. 이념 이야기를 하면 바보 취급받았죠. 맹자가 살았던 시기는 그보다 더 했습니다. 말 그대로 전국(戰國) 시대. 싸우는 나라들의 시대, 부국강병이 지상목표였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찾아온 유명한 지식인에게 양혜왕이 묻습니다. “(맹자가)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당연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맹자>에 실린 답변은, “왜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어짊과 올바름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여기까지라면, 따분한 당위론일 수 있습니다. ‘인(仁)과 의(義)’. 그게 좋은 이야기인 줄 누가 모르나요. <맹자>의 매력은 그다음부터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하죠. 왕이 이익을 이야기하는 게 왜 위험한 짓인지에 대해서요. 왕이 이익을 이야기하면 결국 이익 논리에 비춰서도 손해라고 설명합니다. 왕이 정말 이익을 챙기고 싶다면, 지금 누리는 이익을 잃고 싶지 않다면,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이익이 아니라 ‘인(仁)과 의(義)’라는 겁니다.
그저 막연한 당위, 뜬구름 잡는 도덕론이 아닙니다. 기득권층이 왜 어질고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감동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는 더 자세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람이 추구해야 할 네 가지 덕목,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저 당위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공동체 안에서 조화롭게 발현하는 방식이라는 거죠.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하려면, 갖춰야 할 덕목이라는 겁니다.
마르크스의 저술을 읽으면서 찾지 못했던 답을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동양학에 관심이 생겼는데요. 안타깝게도, <맹자>만큼 강렬한 텍스트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맹자>가 동양학에 대한 첫 경험이었던 건, 제게 큰 행운이었던 거죠. 다른 책은 대부분 조금 읽다 말았습니다. 공대생이던 제가 읽기엔 한문의 벽이 높기도 했고요. 또 <맹자>의 인상이 너무 강했던 탓도 있습니다. <맹자>가 워낙 논리 정연해서, 다른 동양학 텍스트도 그런가 보다 했었거든요.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모호한 서술, 막연한 당위론 등 동양학에 대해 전에 갖고 있던 편견을 뒷받침하는 텍스트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흐지부지 잊고 있었는데요.
그러다 얼마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맹자>의 주인공인 맹가(孟軻)가 지금 한국에 살아 있다면, 딱 진중권 교수 같은 유형이 아닐까 싶었던 거죠. 정말 닮았습니다.
권력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기질, 또박또박 따지는 논객 기질, 반대 파 주장을 자기 방식으로 거칠게 요약해서 공격하는 방식(허수아비 논법?)… 등. 어찌 됐건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이야기가 길었는데요. 사실, 제가 하려던 말은 이겁니다.
제가 습작 중인 소설 <알을 품은 섬>에 ‘기불’이라는 소년이 나옵니다. 활쏘기에 능하다고 돼 있죠. <맹자>, 그리고 진중권 교수를 떠올리며 구상한 캐릭터입니다. <맹자>에 이런 대목이 있죠. “양주와 묵적의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다”라고요.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양주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묵적은 극단적인 이타주의입니다. <맹자>는 이런 두 편향이 다 잘못이라고 하고요.
제가 습작 중인 소설에서 알에서 태어난 자들을 묵적, 그러니까 묵가 집단에 빗댔는데요. (구상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써 나가야 할 텐데, 갈 길이 머네요.) ‘기불’ 소년이 <맹자>의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그런 이야기를 써나 갈 작정입니다.
(제가 앞에서 <맹자> 양혜왕 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워낙 유명한 대목이다 보니, 이런저런 글에서 자주 인용이 됩니다. 그냥 양혜왕 편이라고 하면 되는데, 어떤 분들은 나름대로 풀어쓴다고 ‘양나라 혜왕’이라고 적는데요. 그건 잘못입니다. 양혜왕은 위나라 왕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검색으로 찾아보세요.)
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열번째 이야기 : "우리 자식들 대신 그들을 묻읍시다"
열한 번째 이야기 : "죽은 왕은 썩은 피를 타고 났소"
소설 '내 남자친구는 북한 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