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다비 May 03. 2024

음식에 담긴 성도님들의 마음

사람을 살리는 것



1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받자마자 설레는 맘으로 열어보았다.

보내신 분을 꼭 닮아서 가지런하고 단정한 반찬통들이 배송 중에 혹시라도 새지 않도록 꼭꼭 싸여있었다. 비닐을 벗기고 뚜껑을 여니, 눈과 코로 느껴지는 부여의 냄새. 내가 사랑하던 부여 음식.


큰 교회엔 수많은 목회자들이 거쳐갈 텐데도, 지나간 부목사에게 여전히 마음 써 주시고 사랑 주시는 고마운 분. 마음이 힘들고 울적할 땐 보고 싶어지는 분. 언제 찾아가도 늘 향긋한 차 한잔을 내어 주시던 분. 그 해사한 미소와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같이 빙긋이 따라 웃게 되던, 참 좋으신 분_

본인이 직접 운영하시며 자리를 늘 지키셔야 하는 안경점도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시간과 정성을 내어 음식을 하시고, 택배도 부치셨는지... 병원 가기 전에 맛있는 밥 먹고 힘내라는 그 마음이 음식을 통해 내게 전해졌다. 음식을 꼭꼭 삼키며 그 사랑을 더더 깊이 음미하게 된다. 정말 맛있고 귀한 한 끼를 먹었다. 다 낫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2

둘째를 임신했을 때, 우리 엄마는 많이 바쁘셨고 바빴던 만큼 피곤하다, 시간이 없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첫째 때처럼 딸의 해산 조리를 못해줄 것 같다고 계속 걱정을 하셨다. 일은 정부지원 도우미가 오셔서 해주실 테지만, 자기가 이상하게 몸이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집에 누가 와 있는 것 자체가 힘이 든다고 말이다.


그래서 임신해서 뭐가 먹고 싶은데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하기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엄마가 인천에서 서울을 가로질러 의정부 밑에 붙어있는 우리 집에 갖다 줄 리도 만무하고, 내가 음식하나 먹자고 친정까지 가는 것도 이상했다. 아니 무슨 먹는 거에 눈 뒤집힌 사람도 아니고, 그래야 되나 싶었달까. 그때는 차 마시러 30분을 넘게 가고 주말 오후 내내를 들여 드라이브 겸 밥 먹으러 어디를 가고 그러는 어른들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20대 끝자락이었다. 무슨 밥 한 끼 먹는데 서너 시간을 쓰냔 말이야. 허허..


그래도 먹고 싶은 음식이 솔솔이 생각이 나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시장반찬가게를 기웃거려도 보고, 사람들이 많이 있는 식당 앞을 지나칠 때면 '맛있나? 나도 한 번 들어가 볼까?' 싶기도 했지만 '뭘, 굳이'하는 생각에 늘 옥상 박스집으로 발걸음을 총총 돌리곤 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어떻게 귀신같이 아신 한 분 권사님이 계셨다. "사모님~ 저는 친정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옛날에 임신했을 때 이런 게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모님은 어떠세요, 이런 음식 좋아하실라나요?" 하시면서 자기 며느리보다 훨씬 어린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주시며 황송하게 대접해 주셨다. 그 권사님이 해주신 음식은 정말 집밥 그 자체였다. 엄마 사랑이 가득 담긴 그런 푸근한 밥상. 집도 정봉이네 집처럼 그런 느낌의 집이었다. 배에 다 담을 수가 없어서 남기고 온 반찬들이 집에 와서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그때 생각한 것은 사람이 외모에서 풍기는 것보다 안에서 나오는 인상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권사님은 아주 모공이 뽕뽕 도드라진 피부를 갖고 계셔서, 어릴 때 여드름이 엄청나게 많으셨을까? 스팀 같은 거에 살짝 얼굴을 데이신 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권사님의 요리를 맛보면 그런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고 정말 귀한 손맛이다! 매일 이런 음식을 먹는 가족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만 들었으니 말이다.



3

대학병원에서 수술하고 14일 만에 본수술보다 더 긴 재수술을 하게 되면서, 애당초 3박 4일 정도면 될 거라던 병원 생활이 언제 끝날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와 이제 초등학교를 들어간 아이를 두고 온 나로서는 정말 속이 타는 노릇이었다. 친정엄마가 와 계셨지만 엄마는 오직 당신 딸인 내 걱정에 밤낮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이들이 외할머니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이야기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

엄마가 한 번씩 병문안을 오면  엄마 눈 속에 철철 흐르는 눈물빛 때문에 내가 너무 죄송하고 한없이 슬퍼지기도 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산책을 가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노는 모습을 찍어서 보내준 분이 계셨다. "사모님~ 아이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모님은 회복만 집중해. 얼른 나와서 우리 애들 다 데리고 놀러 가야지!" 하고 응원을 해 주셨다. 남편이 바쁜 주말이면 그분이 우리 아이들을 집에 초대해 주셔서 엄마가 병원으로 나를 간병하러 와주실 수가 있었다. 맛있는 파스타와 닭날개 구이요리를 앞에 두고 (외할머니는 못 해주는 메뉴) 기대감으로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 맛있게 먹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내주셨다.



4

부모님은 부모님이니까, 자식들은 어리니까, 관심을 받는다.

그 와중에 배우자는 참 소외되기가 쉬운 것 같다. 그저 묵묵히 버텨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 날은 남편이, 어떤 집사님이 감자탕을 해다 주셨는데 부드럽고 맛있더라며 내가 넘길 수 있을까 싶어 보온도시락에 조금 담아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내 상태는 패혈증이 와서 아무것도 삼키질 못하고 목구멍이 딱 막힌 것 같이 되었던 때였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직접 만들어다 주셨다는 이야기에 일어나서 한 술 뜰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당시 만삭의 몸으로 매일 출근하는 간호사 셨기 때문이다. 아주 터울이 많이 나는 늦둥이를 임신하셔서 나이도 있었고, 젊은 임부라 해도 몸이 이래저래 힘든 만삭의 시기인데 담당 목사님이 사모님 입원이 길어져서 식사도 못 하실까 봐 걱정이 되어 밤새 국물을 끓이고 기름을 걷어내며 감자탕을 만드셨을 그 모습이 눈에 훤해서, 없는 기운을 쥐어짜서 일어나 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정성을 쏟아부어서 그런지 정말 맛있었다!! 앞으로 어디서도 그때 그 감자탕 맛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



5

나는 평소 김치를 그렇게 즐겨 먹지는 않는다. 김치가 없어도 라면을 짜장면을 볶음밥을 매우 잘 먹는다. 그런데 가끔 특정한 어떤 김치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갑자기 열무김치가 먹고 싶다던가, 오이소박이가 먹고 싶다던가 하는 때 말이다. 그럴 때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건지, 딱 내가 먹고 싶던 그 김치를, 딱 내 입맛에 맞는 상태로 가져다주시는 권사님이 계시다. 아주 타이밍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내가 어머, 어머!! 를 연발하며 이거 제가 먹고 싶었던 건데 너무 맛있고 감사하게 잘 먹었다고 말씀을 드리면 "사모님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시장에서 산 거예요~" 하며 걸크러쉬 뿜뿜 하시는 분이다.

이 권사님은 내가 몸이 아파서 교회를 빠지는 날이면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편의점에 가셔서 1인 1봉 플렉스를 시켜주시기도 한다. 뭘 이렇게 눈치 없이 많이 주워 담아왔느냐고 내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면, "내가 이제 그만 됐다고 말씀드렸는데 권사님이 막 이것도 저것도 다 담아주셨단 말이야"하고 아이들이 전한다.









사랑은 맛있는 걸 먹으면서 깊어진다. 데이트를 하면서 아무것도 함께 먹지 못하게 한다면 사랑이 깊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적절한 때에 맛있는 음식을 전해주신 성도님들이 계셔서 내가 적성에 안 맞는 사모 자리를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도 함께 묵상하게 되는 아침이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모두 잘 먹는 것이, 어쩌면 인생의 핵심이 아닐까_











즐겁게 읽으셨다면 하트로 공감을 표현해주세요 :)


이전 25화 옛날엔 선풍기만 갖고도 살았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