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다.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 자매처럼 말이다.
아빠는 6시 반쯤 집에서 출발해 밤 10시가 넘어야 집에 오는 삶을 사셨다. 주 6일 근무는 일상이었고, 철야근무도 왕왕 있었다. 아빠에게 명절은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고 본가와 처가를 가는 휴일이 아니라, ‘많이 잘 수 있는 날’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OO인 자니~?” 할머니께서 물으시면 가족 중 누군가 “다비 아빠는 어느 방에서 자고 있다”고 대답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우리 아빠만 가족들과 대화도 하지 않고 저렇게 며칠 동안 잠만 주무시는 것이 겸연쩍을 때도 있었다.
부모님과 외출할 때면 놀이동산이나 사람이 많은 곳을 간 적은 거의 없다. 한산하고 별도의 입장료가 필요 없는 곳 위주로 다녔는데, 3학년 때쯤이던가, 스케이트장을 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스케이트장에서 아빠의 사랑과 책임감을 느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도 딸이 엉덩방아를 찧어 아프게 될까 봐 최선을 다해 붙잡아주는 모습. 아빠와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아빠는 내 스케이트만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아빠가 나를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린 서로 눈을 바라보지는 않았지만_ 함께 있었다.
남편은 내가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라 좋았다고 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자기가 사랑을 해 줄 때 여자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남자로서 그것만큼 기운 빠지는 일도 없다고 한다. 나는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맞는가?
사랑의 언어가 다르면 얼마나 불행한가.
나는 아빠가 엄마를 엄청 사랑한다고 느꼈는데, 엄마는 평생을 외롭고 불행했다. 아빠와 엄마의 맞닿지 않는 시선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내가 과연 사랑받은 느낌 충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다.
아빠의 사랑에 관해 생각할 때면,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새로 개발된 택지 내에 개교한 학교로, 나는 거기를 최하위 지망 순서를 적어서 냈는데 어쩌다 보니 그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고심을 해서 열몇 개의 고등학교 지망순위를 적었던가 허탈했다. 새로 생긴 택지이다 보니 이제 입주가 시작된 단지도 있고 아직 공사 중인 단지도 있고, 그러니 입학하던 시기에는 당연히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그런데 그 학교는 13개의 고등학교 중에서 유일하게 아빠의 출근길에 지나가는 위치에 있는 학교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우연이 참 재미있다. 그래서 나는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아빠의 차를 타고 등교를 시작했다. 아빠의 출근 시간에 맞추어 학교를 가면 거의 내가 첫 번째로 등교하는 학생이 되었다. 국도의 한 곳에 내려 새벽공기를 가르며 논두렁길을 조금 걸으면 한순간에 번듯한 택지의 한중심으로 들어섰다.
친구와 카풀을 해서 다녔는데, 그 친구가 5분 이상 늦어지면 아빠는 그냥 출발을 하셨다. 출발에서 5분이 지연되면 아빠 회사에 갈 때쯤엔 큰 차이가 난다고 했다. 에누리 없이 출발해 버리는 아빠가 야속하고, 혼자 환승을 거듭하며 등교할 친구가 걱정되기도 하고, 나도 그냥 내려서 친구랑 같이 갈까 고민이 되는 날도 숱하게 많았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나면 9시 40분. 공교롭게도 아빠는 그때쯤 또 그 국도를 지나가시는 시간대였고, 그렇게 우리 모녀는 3년간을 아침저녁으로 함께 했다. 어쩌다 내가 먼저 도착해 아빠를 기다리게 되는 날은 아빠에게 시간 안 지키면 어떡하냐, 내가 캄캄한 길에서 얼마나 무서운 줄 아느냐, 시간 못 지킬 것 같으면 다른 방법을 고르게 연락을 해야지, 등등의 가시 돋친 말들을 했었다. 나는 그렇게 아빠가 나를 매일 내려주고, 데리러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당연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해 보니 출근은 일정해도 퇴근은 그날그날 잔업상황이 달라 똑같이 맞추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어른이 되어 직장인이 되고 나서, 비로소 아빠가 3년간 나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데리러 왔던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빠가 그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달려왔었던가를. 딸이 혼자 캄캄한 국도 길에서 기다릴 것을 맘 졸이며 얼마나 긴장 속에 운전하셨을지를.
엄마의 임종소식을 전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이제 우리 둘이 남은 거야”라고. 내 말을 듣고 이제껏 담담하게 말씀하시던 아빠가 많이 우셨다. 혼자 남은 아빠가 짠하다. 형제들 사이에서도 치이고, 사회에서도 기죽고, 평생 마누라에게 무시나 당하며 사신 아빠의 삶이 안됐다. 그런데 아빠랑 대화를 하면 불시에 무맥락 짜증을 팍 내시는 게 많아서,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가기가 조심스럽고 떨린다. 거짓말탐지기 보드게임을 무한정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엄마와 나에게 한결같이 짜증 내고, 한결같이 무뚝뚝하고, 한결같이 성실했던 아빠가 이제는 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아빠가 줬던 퍽퍽살을 먹고 나는 이만큼 자랐다. 퍽퍽살에도 사랑이 있다.
아빠와 잘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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