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분의 장례식장에서, 후임으로 어떤 목사님을 청빙 할 계획이냐가 논해졌다. 사모님과 아이들이 슬퍼하고 있는 그곳에서 말이다.
청년으로만 해맑게 살다가 사모가 된 나는, 정말이지 인류애가 바사삭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정치 같은 거 모르겠고, 그냥 그 사모님과 아이들이 너무 애달펐다.
굳이 빈소에서 그랬어야 했나 싶었다.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생판 남인 나도 이렇게 사연만 들어도 안 됐고 슬픈데, 어떻게 목사 동료이고 한 교회를 같이 섬긴 당회원들이 그럴 수가 있는지 도무지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례가 마무리되자마자, 눈물도 채 마를 새 없이 사모님과 아이들은 집부터 비우고 나가셔야 했다.사택은 교회에서 목사님께 제공한 집이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부재하게 되자 나머지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정말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모님의 일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건데, 남편이 먼저 떠나게 되면 나랑 아이들도 저렇게 되는 건가 싶었다.
믿음을 떠나 현실, 생존 그 자체의 날것이었다.
그런데 또 시일이 한참 지나 생각해 보니, 교회에서 고인이 된 목사님의 가족에게 얼마 큼의 시간을 드려야 될까 그것 또한 쉽지 않은 문제였다.당장 매주 예배가 진행이 되고, 작은 교회는 목사님 혼자 모든 예배를 담당하시는데, 가족들의 슬픔을 기다리다 교회가 다 흩어질 수 있으니까 그런가,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나 자신이 너무 꼰대 같고 싫어졌다.
아니, 이걸 이해를 한단 말이야?
이렇게 기성세대를 이해하게 되고 나도 그 물에 스며들어가는 거야?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갓 서른 살이 지나던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어서, 한동안 몸도 마음도 정말 많이 아팠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남편이 코를 골지 않고 유난히 곤히 자면 심장이 철렁해 남편의 코에 떨리는 손을 대 보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이 도 저 도 못 하겠다_
참말로 딱 그 짝이었다.
#단 하루라도_당신보다 내가 먼저 가는 게 맞아
#끈 떨어진 연 되는 거 한순간
#내 수명 당신에게 나눠주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즐겁게 읽으셨다면 아래의 하트(라이킷) 버튼을 꾸욱 눌러주세요! 브런치는 조회수나 좋아요로 수익이 생기는 구조가 아니라서, 하트라도 많이 눌러주시면 작가가 다음 글을 창작하는 데에 기부니 조크등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