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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 Jul 23. 2017

그 여行자의 집 (25)

2017년 가을, 서른셋 재현의 그 해. #25

25.

단아를 처음 만난 건, 2008년이었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날씨 때문이 아니라 경제 때문에 서늘함과 위축됨이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원체 세상 돌아가는데 관심이 없는 놈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다들 취업이 어렵다고, 청년들이 살기 힘든 시기라고 했다. 취업에 대한 생각이 없는 내게 그 어려움이 크게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귀에 못이 박히게 떠들어대는 주변 이야기에 나는 괜스레 피해자가 된 느낌을 받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 같은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안정적인 게 최고라 여기는 분이셨다. 나는 세상의 말을 받아 취업이 어려운 시기라고 둘러 대었지만 제대로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글을 열심히 써 언젠가는 등단 작가가 되리란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성화에, 또 막연하게 영어공부를 해두면 좋을 거란 생각에 6개월 치 어학원을 한꺼번에 등록해 두었다.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작은 사고로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어 휴학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보고자 학원에 들린 날, 복도에서 그녀를 만났다. 문 넘어 반대편에서 건물 밖을 향해 나오던 그녀는 목발을 짚고 걸어오던 나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문을 열고 내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내가 고마운 마음에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입을 떼기도 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그녀는 빠르게 나를 스쳐 밖으로 나가곤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스친 좋은 향 때문이었을까? 뭔가 설렘을 간직한 채 학원으로 들어서 안내 앞에 섰는데 데스크 밑에 그녀의 사진과 신청서가 놓여있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무엇을 도와주겠냐는 안내의 말에 나는 휴학 신청은 그만두고 반을 바꿀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나는 토익 시험반에서 영어회화 2반으로 알지도 못하는 그녀의 그림자를 쫒아 반을 바꿨다. 회화반의 외국인 선생님은 8명뿐인 학생들에게 수업시간마다 돌아가며 자신의 하루를 영어로 이야기하게끔 시켰다. 다들 비슷한 수준의 초급자라 문장을 구사하는 수준들이 어설프고 내용이 빤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초등학생들의 그림일기 수준이었다. 그녀는 원래 말수가 적은 건지 아니면 영어를 써야 하는 환경의 부담스러움 때문인지 동그랗게 뜬 눈을 천천히 껌벅이며 열심히 듣다가 꼭 해야 할 말만 천천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후, 그녀가 나보다 한두 살쯤 많을 것 같다는 나의 추측과 달리 다섯 살이나 많은 데다 3년 차 회사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적잖이 충격이었지만, 묘하게도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그녀가 명확하게 여자로 느껴졌던 것 같다. 옆에 두고 싶은 여자. 



프로젝트 여행자의 집, 네 번째 이야기 中 :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는 글 참고 

그 여行자의 집 : 1장, 단아의 이야기  |  2장, 경재의 이야기 | 3장, 민주의 이야기 | 4장, 재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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