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뚜르드몽블랑일주(9) 라풀리에서 포르클라즈고개
우리의 코스는 철저히 비수기에 문을 연 숙소의 일정에 맞춰 짜여졌다. 오늘 포르클라즈 고개의 호텔에 우리는 도착해야 한다. 샹펙스행 오전 8시 15분 '첫'버스를 타야하는 이유다. 이 호텔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내일 샤모니로 돌아간다. 사실상 TMB 마지막 밤인 셈. 이 날이 오고야 마는구나. 괜히 싱숭생숭하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쏟아진다. 아, 우리 날씨 운은 여기서 끝인가… 지금까지 뽀송한 날씨덕에 쾌적하게 트레킹해왔던 것이 새삼 행운이었구나. 오래전 스페인 카미노에서 줄창 비맞고 걸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별수없지, 그래도 딱 이틀 남기고 비가 와주는 것이 어디냐. 비옷을 주섬주섬 입고 길을 떠난다.
거의 열흘만에 차를 처음 타는데다, 꼬불꼬불 산길이다 보니 멀미가 몰려온다. 버스는 중간에 Orsieres라는 마을에서 20분 대기후 출발해 아홉시반 쯤 샹펙스에 도착했다. 예쁜 호수가 있는 마을이라고 했는데 비바람이 몰아쳐서 둘러볼 틈도 없이 산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몽블랑의 매운 날씨맛을 처음 보는지라 좀 정신을 놓았는지 지도상에서 옆 길로 가고 있는 것을 한참후에야 발견했다. 멘붕이 올 뻔 했지만 재빨리 가던 길을 다시 돌아가 바른 길을 찾아갔다. 어제까지와는 180도 다른 혹독한 날씨 속에 침엽수로 가득찬 숲길을 걷고 있다. 분명 이틀전 낮에 더워서 반팔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비옷을 꽁꽁 입고도 서늘하다니.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숲을 지나고 평원이 나오더니 다시 숲 오르막이 이어졌다. 점심때가 지났는데 밥 먹을만한 곳도 나오질 않는다. 이 날씨에 여유부릴 수도 없으니 잠깐 비가 멈춘 돌길 오르막에서 서둘러 밥을 해먹기로 했다. 누가 보면 눈물나게 짠한 모양새로 반찬 하나에 맨밥을 허겁지겁 먹었지만-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몸이 확 풀린다. 여기서 싸온 알파미를 싹 털어냈다.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실감하면서, 칼같이 딱 떨어진 밥양에 소오름. 밥을 다 먹자마자 비가 쏟아지는 타이밍까지.
...이거, 뭔가 행운의 여신이 아직 떠나지 않은 건가?
이때 살짝 힌트를 준 것이었을까.
사실은 TMB의 진짜 클라이맥스는
이틀전 몽드라삭스가 아니라
오늘이었다는 것을.
허접하고 슬플만한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던 점심식사 이후- 안개가 자욱한 침엽수 숲이 이어졌는데,
이거 실화냐 싶은 일이 일어났다.
조금씩 떨어지던 눈은 점점 함박눈이 되었고, 우리 뿐인 숲이 점차 하얗게 바뀌는 게 무슨 마법같았다.
눈은 이상할 정도로 슬로우모션으로 내렸는데, 죄다 A급 크리스마스 트리같은 거대한 나무들에 눈꽃이 금새 피어난다.
미쳤다…!
몽블랑의 마지막 선물인가? 어제만 해도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으리라 절대 상상하지 못했다.
황홀한 장면에 어리벙벙할 뿐이다. 추위도 잊을 만큼.
영상, 슬로모션 영상, 사진, 파노라마- 내 허접한 아이폰으로 찍을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이 순간을 담아보려 애썼지만 다시보니 당시 느낌의 한 1/100 수준이다.
정신차려보니 포근하게 내리던 눈이 점점 눈비바람으로 바뀌고 있다.
포르클라즈 고개에서 제일 심했는데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어 서둘러 하산했다. 5시가 넘어 호텔에 겨우 도착했다.
도로에 덩그러니 있는 호텔이었는데, 우리 몸이 얼어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따뜻하고 아늑했다.
이 호텔도 오늘 이번 시즌 마지막 영업일이다. 그리고 우리밖에 묵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마지막 숙소까지 마지막 손님.ㅎㅎ 이 역시 행운이겠지.
정성껏 차려낸 저녁식사도 정말 맛있었다! 다음날 아침은 식탁에 차려둘테니 알아서 먹고 가란다.ㅎㅎ 다들 오늘 퇴근하는 모양. 오늘 호텔에 우리밖에 없는 건가 보다. 귀곡산장...? 하지만 무서움을 느낄새도 없이 골아떨어짐.ㅎㅎ
뭔가 고생했는데 완벽한 하루인 것 같은 TMB 트레킹 마지막 밤이다.
건강하게 여기까지 온 것과, 아름다움을 최대한 보여준, 자연에 대한 감사함이 아쉬움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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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뚜르드몽블랑 일주 트레킹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