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주교 신자였다. '였다'라는 말은, 과거에는 그러하였으나 현재에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한때, 수녀원 기도모임도 매주 출석했다. 청년 전례단 부단장으로서 1년 동안 봉사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더이상 천주교 신자가 아니게 된 이유는 상당히 복합적인 것이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서술해 볼 생각이다.
아무튼, 내가 천주교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나이 서른이 넘도록 동정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천주교에서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는 것은 '대죄'로 여긴다. 자위도 죄로 여겨서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처녀이다. 그런데 약 석 달 전부터 천주교 신자가 아니니 굳이 혼전순결을 지킬 이유가 없다. 성적으로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동정 없는 세상>을 재독하면서 나의 성관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동정 없는 세상>은 내가 앞서 다룬 박현욱 작가의 다른 작품들 <새는>, <아내가 결혼했다>처럼 영상화되었다. 박현욱 작가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명랑하고 쾌활하다. 그 특징으로 인해 영상화되기에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드라마 <새는>과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았듯이 드라마 <동정 없는 세상>도 보았다. '앙큼 발칙한 성장 이야기'라는 점은 원작 소설과 드라마의 공통분모이다. 하지만, 영상화되는 과정에서 내용이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드라마보다는 원작 소설을 중심으로 나의 생각이라든지 느낌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쓰겠다.
여자친구 서영에게 "한번 하자."라고 조르는 준호가 여기 있다. 준호는 자유분방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아빠는 없고 미용실을 운영하는 '숙경씨'('숙경씨'는 엄마다.)와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백수인 '명호씨'('명호씨'는 삼촌이다.)와 함께 산다. 숙경씨는 앞날에 대해 고민하는 준호에게 따뜻한 말을 해준다. "네가 대학생 아들 아니라고 뭐라 하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것을 해."(149p) 명호씨도 삼촌이라기보다 친구 같은 존재이다. 담배도 나눠 피우고, 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도 나눈다. 특히 명호씨가 준호에게 한 조언들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포르노에 관한 것이었다. "포르노라는 것은 남자의 관점으로, 그것도 아주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여자를 가장 천한 노리개로 삼는 것을 묘사하는 거야.(...) 괴리가 생기게 될 수밖에 없는 거지. 심하면 나중에 실제의 성생활에 적응을 못 할 수도 있어."(83,85p) 물론 아빠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좋은 영향을 주는 어른 둘하고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위의 삼촌의 조언을 통해 준호가 포르노를 보며 성욕을 해소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준호에게는 포르노 말고도 성욕을 해소하는 장치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야설이다. 본인과 여자친구 서영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야설을 쓴다. '여자친구와 얼마나 하고 싶으면 그런 야설을 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설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사춘기 때에 나도 글로써 성욕을 해소했다. 나는 동방신기 팬픽을 참 열심히 읽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설(중림동 새우젓 (팀명), <'8반 예쁜이'를 아시나요>, 시사IN, 2015.01.20.)이 있는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흰 종이에 까만 글자인데, 오빠들이 그 아래에서 서로 뒤섞여 연애질을 하고 있었다. (...) 그게 동성애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그들은 서로 순수하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야설이든 팬픽이든 '그것'의 영향은 내게 대단한 것이었다. 아마 준호에게도 그랬으리라.
여자친구 서영과의 상상을 글로 쓸 정도로 성욕이 강한 우리 준호. 하지만 여자친구는 쉽게 몸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준호는 홧김에 사창가에 가지만 곧,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도망친다. 애초에 사창가에 간 건 잘못이지만,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준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 준호의 성욕에 못 이겨 서영은 몸을 허락한다. 하지만, 몸을 허락한다고 성관계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준호든 서영이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서로 헤매기만 하다가 끝난 것.
성공한 첫 경험은 우연에 의해서였다. 어른이 계시지 않는 서영이 집에서 준호는 커피만 마시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키스를 하게 되고 어쩌다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게 되었다. 그렇게 첫 경험을 한다. 허나, 생각과는 달리 준호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씁쓸함과 허탈감을 맛보았다'(171p). 준호를 뿌듯하고 설레게 만든 건 섹스 그 자체가 아니라 품에 안겨 있는 서영이었다. 서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 끝에 다시 한번 성관계를 맺는 두 사람. 준호는 깨닫는다. '아아,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176p)
이 책 <동정 없는 세상>을 서점에서 절친 J양과 함께 들춰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서점에서 큰 소리로 "이 책 되게 야하다. 너도 한번 읽어봐."라고 말했다. J양은 "수아는 국문과니까 여러 가지 책을 읽는구나."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성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팬픽을 참 많이 읽었다. <몽상가들>, <색, 계>, <아가씨>와 같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도 적잖게 보았다. 다만, 내가 아직 처녀인 데에는 종교의 영향이 큰 듯하다. 아니, 어쩌면 아직까지 섹스를 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걸 수도 있겠다. 몇 날 몇 실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이 책 <동정 없는 세상>과 콘돔을 주고 싶다. 이건 나의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