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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곳이, 나의 꽃대궐

by 정린 Mar 30. 2025

봄이 먼저 도착한 동네


따뜻해진 날씨에, 기다렸다는 듯 꽃들이 터진다.

벌써 이 동네에 이사 온 지도 5년이 되어간다.


부동산 시장의 열기가 뜨겁던 시절, 이곳도 재건축이라는 꿈을 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소액 투자를 노리던 이들에겐 ‘돈 안 들이고 새집을 얻는’ 기회처럼 여겨졌고, 그건 그 시절의 국룰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해 이사 온 것이었고, 이 집은 그저 낡고 저렴한, 흔히 말하는 ‘구축’ 일뿐이었다.

그럼에도 좋았던 점이 있었다.

이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꼭 닮아 있었다.


어린 시절을 닮은 구축의 풍경


반듯하게 2열로 늘어선 판상형 5층짜리 동들이 네모난 단지를 이루고 있는 모습.

어렴풋한 어린 시절의 기억, 오래된 앨범 속 사진 한 귀퉁이에 배경으로 남아 있던 ‘나의 살던 고향’과 닮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

그마저도 어린 시절 집과 똑같았다.

운동을 잘 안 하는 나에게는 계단이라도 오르내릴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며 살 집으로 결정했다.


장터의 활기, 손끝의 정


단지 후문에는 5일장이 선다.

할머니들은 앉은뱅이 의자에 앉거나 돗자리를 대충 깔고, 냉이와 시금치를 말끔히 다듬어 소쿠리에 담아낸다.

인건비도 안 나올 법한 가격. 나는 냉이와 시금치가 아니라, 그 손길을 사는 기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순대와 특수부위, 입맛에 꼭 맞는 청국장도 여기서 산다.

해가 기우는 무렵, 떨이 시간에 맞춰 가면 불확실한 로또보다 확실한 ‘할인’이라는 당첨이 기다린다.


떠나고 싶은 마음, 다시 흔들리다


이 동네를 나름 애틋하게 여기며 살아왔지만, 요즘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어쩌다 보게 된 무속인 선생님이 “지금 있는 곳 터가 잘 안 맞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더더욱 떠나야 하나 싶었다.


벚꽃 아래에서 마주한 감정


그러던 오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 동네 입구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보호수처럼 서 있는 벚꽃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가 정이 들었구나.’


아침 출근길에 바쁜 걸음으로 스쳐 지나갈 때보다, 포근해진 날씨 덕에 꽃송이들이 훨씬 더 풍성하게 부풀어 있었다.

작년, 재작년 이맘때 밤산책을 하며 마주쳤던 그 벚꽃나무.

가로등보다 더 환하게 내 봄밤을 밝혀주던 연분홍빛.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워 가슴이 뭉클했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기억들


봄이 되면 가장 먼저 피어나는 소담한 홍매화,

깎아놓은 참외처럼 탐스럽게 달린 목련,

노랗고 분홍진 민들레와 벚꽃,

그리고 여름이면 나보다 키가 더 크게 자라는 접시꽃…


여름에는 잔나비의 "밤의 공원"을 들으며,

가을에는 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를 들으며 걷던 공원도 있다.


결국, 정이 든다는 것


그래. 집이 싫었던 게 아니었다.

계절마다 제자리를 지키며 다시 피어나는 꽃들,

장터의 활기,

어린 시절 고향을 닮은 이곳.


일상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한결같은 동네 탓인 양 투정했던 것뿐.

나는 그런 것들에 기대어, 그렇게 버티며 살아온 것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구축 아파트. 이곳이 "꽃대궐"이지.


올봄엔 동네 사진을 찍어두어야겠다.

재건축되어 이제 가족관계증명서의 본적으로만 남은 고향처럼,

이곳도 언젠가는 사라질 테니까.

분명히 그리워하게 될, 내가 머물던 모습을 기록해 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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