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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Mar 11. 2023

꽃밭에서 반짝반짝


엄마! 이 중에서 엄마 요정 때 모습이랑 제일 비슷한 거 뭐야?


아이들이 거실바닥에 색칠도안을 가득 펼쳐놓고 고르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과거(?)를 오픈한 뒤로 쏟아지는 질문에 너무 피곤해서(ㅋㅋㅋ) 만약 엄마의 정체가 탄로 나면 엄마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반 협박으로 이제 우리 집에서 요정이야기는 금기시되었는데, 한 번씩 이렇게 아무도 없으면 아이들은 툭툭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물어보곤 한다.




엄마의 과거가 궁금하다면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음... 여기는 없는 거 같은데...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도 없어? 그럼 내가 그려줄까?
응? 아니, 괜찮아. 그냥 그거 색칠해~ 예쁜 그림 많네.
내가 그려줄게. 어떻게 생겼는지 엄마가 얘기해 주면 그릴 수 있어. 말해봐.
왜?


진짜 괜찮은데... 왜 자꾸 말하라고 하는지....... 안 그려줘도 괜찮은데...........


아~ 우리는 옛날에 갔던 곳이나 아니면 뭐 생각이 잘 안 나거나 보고 싶을 때 사진 찾아보면 되잖아? 우리나라는 사진이 있으니까.
근데 엄마는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잖아. 내가 엄마라면 슬플 거 같아.
엄마, 아직은 기억나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리면(지나면)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그림으로 그려줄게.
보고 싶을 때마다 봐, 엄마. 알겠지?


뭔가 감동이다. 그림을 보면서까지 몰래 회상해야 할 만한 과거가 진짜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아이는 신성한 작업을 시작하려는 듯이 굳이 새 스케치북을 꺼내 펼쳤다. 색연필도 가져와서 연필깎이로 뾰족하게 깎고 가지런히 정리를 했다.

마지막으로 쉬를 하고 오겠다며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수건에 덜 닦인 손의 물기를 날리기 위해 박수를 짝짝짝 치고 자리에 앉았다.


엄마, 이제 준비됐어. 이야기해 줘.
일단은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옷이랑 날개모양만 얘기해 주면 돼.


계속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조금 찔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건 꽤 감동적이니까.


음...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옷은 짧은 원피스였는데 흰색이야. 팔은 길고 나팔모양이고 목이랑 허리랑 치마 끝에는 은색 반짝이가 달려있었어.
김연아언니옷이랑 비슷하네?


들킨 건가....


날개는 이것(색칠도안)보다 조금 더 크고 끝이 둥글었어. 약간 이런 모양으로.


나는 이면지에다 날개모양을 그리며 시범을 보였다. 어느새 나도 진지해졌다.


(심쿵) 우와~ 나비 같아.
응~ 알겠어. 내가 다 그릴 때까지 보지 마.


아이는 놀이테이블을 세우고 그 뒤에 숨어 그리고 지웠다가 또 열심히 그렸다. 중간중간 자기 방으로 왔다 갔다 하고, 완성도 높은 그림을 위해 머리카락은? 신발은? 하고 물어볼 뿐 말도 없이 집중했다.

본 적도 없는 엄마의 과거모습을 그려주기 위해서.


완성이야 엄마. 열어봐!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스케치북 표지를 넘겼다.

예쁜 마음으로 그려서인지 그림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엄마가 꽃의 요정이었다고 해서 머리에 화관도 그리고 손에 꽃잎도 들고 있어. 꽃을 만드는 중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이건 낙서가 아니야, 엄마가 날아다니니까 꽃잎들이랑 민들레씨앗도 같이 날리는 걸 상상해서 그린 거야. 알겠지?
날개는 저번에 엄마가 비눗방울처럼 무지갯빛이 난다고 해서 이렇게 색칠했어.
은색 보석스티커가 있었으면 좋았는데 없어서 보라색 스티커를 붙였어. 어때? 조금 비슷해?
그리고 얘는 공기의 요정인데 엄마가 꽃을 피울 때면 꼭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내 마음대로 상상해서 그려봤어.


이상하다. 어딘가 익숙하다.

사람의 뇌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하도 상상하고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 건지 진짜 내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옷인데 내 옷장에 저런 옷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처음 만나는 공기의 요정도 낯설지가 않다.



아이가 커오면서 수많은 그림을 나에게 선물로 그려줬다.

모든 그림들에는 다 이야기가 있었고 그린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특별히 아끼는 아이의 그림이 몇 점 있는데 오늘부터는 이것도 포함이다.

나중에 아이가 더 커서 이건 모두 엄마가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허무해하며 유치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엄마는 지금껏 그랬듯이 또 한 번 너의 그림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고.

엄마의 유치한 장난에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받아줘서 감동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는 그림을 잘라 안방 방문 앞에 붙이면서 그랬다.


안방이 엄마가 제일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니까 여기 붙여두는 거야.
자주 보면서 잊지 마. 엄마 이때 너무 예쁘잖아.
오래오래 기억해, 엄마.


응. 엄마도 너무 예쁜 너희 모습을 더 많이 찍어둬야겠다.

아주 아주 나중에 지금의 네 모습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 질 때 짠! 하고 꺼내서 보여줘야겠다.

방문 앞에 걸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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