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 본 브러치의 글들은 <표류사회 : 한국의 가족문화와 여성 인식의 변화사>(가제) 라는 이름으로 2021년 9월 말 경에 출간되기로 하였습니다.
태종 때 갑자기 궁궐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 임금을 덮치려 했다. 그때 멀리서 그 상황을 발견한 무관 김덕생은 재빨리 활을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 태종은 고마운 마음에 3등 공신을 하사하려 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임금 앞으로 활을 쏜 행동이 매우 무엄했다며 극구 반대했다. 결국 김덕생은 낮은 벼슬로 지내다 요절했고, 가난한 그의 무덤은 유지조차 힘든 지경이 되었다.
훗날 그 사연을 전해 들은 세종이 김덕생의 품계를 높이고 제전(祭田: 제사 지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을 하사해 제사를 잇게 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의 남은 자손은 외손뿐이었다.
때문에 김덕생에게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맞아 제사를 모시게 하자는 주자학적 의견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내 다른 대신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지금 세상의 풍속에는 비록 제사 지낼 아들이 없더라도, 딸의 자손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아들로 후사를 삼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정리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 제전을 덕생의 외손자에게 주어 제사하게 한다면 그 자손들은 반드시 성심껏 제사를 받들 것이고 귀신도 감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김덕생의 아우인 김우생의 작은아들에게 양자가 되라 하시면, 반드시 덕생의 외손자랑 노비나 토지 문제로 다투게 될 것이고 서로 편치 않을 것이니, 그것이 어찌 덕생이 원하는 바이겠습니까? … 본래 제사는 정성을 위주로 하는 것인데 양자의 정이 어찌 진짜 자손[本孫]만 하겠으며, 또 진짜 자손만큼 성심으로 제사할 수 있겠습니까? 제전을 덕생의 외손에게 주어서 길이 제사하도록 특별한 은전을 베푸소서.” 『세종실록』 97권, 세종 24년 8월 14일 신축 4번째 기사.
세종 역시 그 의견이 합당하다 여기고 당시 풍속대로 김덕생의 외손에게 제전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15세기까지도 친손과 외손은 모두 진짜 자손(친혈육)이었고, 친혈육의 정이 ‘같은 부계 성씨 가문’이라는 명분보다 당연히 우선시되었다.
하지만 17세기 말(1669년) 현종 때, ‘(양자가 있으면) 훗날 친아들이 태어나도 양자의 봉사권(제사권: 즉 가계계승권)을 인정하라’는 수교가 내려지며 방향은 급전환됐다.
양자 입적 후 본처가 아들을 낳으면 친자식은 차남이 되어 제사와 봉사조[봉제사를 위해 따로 주는 재산]는 양자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현실적인 혈연관계보다 주자학적인 의리 명분이 더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