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나는 남편에게 호기롭게 혼자서 육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한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남들이 다 겪는다고 하는, 육아우울증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육아우울증. 사실 너무나 진부한 단어다. 이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수도 없이 등장하고 있고, 어떤 인터넷에서는 심지어 죄악시되는 단어이다. 원해서 아이를 낳았으면서 왜 우울증에 걸려? 집에만 있는데 일도 안 하고 너무 좋은 거 아닌가?
나는 애초에 육아우울증이라는 단어는커녕 출산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가 이 거대한 수렁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참으로 운명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감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깊어지는 무기력감은 나를 끝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려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나? 이렇게 살 거면 공부 적당히 하고 놀고 싶은 거 놀면서 재미있게 살걸.’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난 내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고, 내가 너무 가엾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가엾은 10대에 대한 보상심리가 너무나도 가득했다.
내가 얼마나 공붓벌레였는지 자랑을 좀 하자면, 학창 시절부터 범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만 한 끝에 남들이 알아주는 명문대를 다녔고, 약학대학 편입에도 떡하니 합격해 약사라는 이른바 ‘사’ 자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며, 졸업한 이후에는 내로라하는 대형 회사들에 턱턱 합격했다.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나 할까?
나는 주변인들의 부러움을 사며 화려한 서울 라이프를 즐겼었다. 그러던 중 직업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다. 이제 내 인생은 행복으로 가득하겠지? 아 신난다!
하지만 이게 웬걸,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시골에서 혼자 아이를 돌보는 꼬질한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순환근무가 일상인 남편의 직장을 따라 시골로 내려왔는데 주변에는 아는 사람은커녕 또래 친구도 아무도 없다.
심지어 아이를 출산했을 때는 그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코로나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만나기도 꺼려하던 때였다. 게다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양가 부모님마저 없었다. 시댁부모님은 편도 2시간 거리, 친정 부모님은 편도 3시간 거리. 남편은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기 일쑤였다. 나는 소위 말하는, 그 죄악시되는 단어, ‘독박육아맘’이 되어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친구보다 성적이 좋아야만 잠을 잘 수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내 주변 사람을 질투하고, 인정에 목말라하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꼬질한 아줌마라는 현실에 만족할 리 없었다.
나는 아이를 돌볼 수 있으면서도 나의 멋진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는 괜찮은 직장을 계속해서 검색했다. 어떤 직장을 다녀야 아이를 돌보면서 일할 수 있을까? 야근이 없고 회식이 없는 직장이 없을까?
나는 내가 다녔던 회사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다녔던 회사들은 소위 말하는 글로벌 탑 회사들이었고, 여성 친화적이고 육아에 긍정적인 회사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직장상사들 중에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는 사람, 아니면 아예 딩크이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 여야 승진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정말 대한민국 살기 힘들다.
그러던 중, 예전부터 눈여겨본 공공기관에서 채용을 한다는 공고를 보게 된다. 공공기관에서는 육아휴직도 3년이나 쓸 수 있고 육아기 단축근무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 이게 웬걸? 너무 괜찮네! 나는 채용공고를 본 바로 그날, 당장 자기소개서 작성을 시작했다. 여기에 붙으면 이 지긋지긋한 시골라이프도 안녕이야! 나는 이전에 쌓아놓았던 스펙을 믿고 자신 있게 지원했고, 결국 합격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당시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였다. 안정적인 생활보다 인정받는 삶, 화려한 도시 라이프를 원했다. 어찌 보면 시골에서의 외로운 삶을 벗어날 수 있는 핑곗거리를 만들고자 거리가 먼 직장을 택한 것이었다. 남편은 어차피 순환근무하는데 내가 날 포기하면서 따라다닐 필요는 없지 않겠어?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찾지 못했다.
내가 새 직장 주변으로 이사를 왔을 때, 아들은 그 당시 18개월이 조금 넘은 상황이었다. 마의 18개월이라고 들어봤는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이른바 ‘독점육아’로 잔뼈가 굵어진 프로 육아맘이었다. 지금까지도 혼자 육아했는데 일하면서 육아하는 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에겐 집에 있느니 회사에 있는 게 훨씬 쉬운 일이었다.
나는 미리 다양한 어플 검색을 통해 하원 이모님을 섭외해 놓았다. 물론 급하게 이모님을 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판단 미스들이 있긴 했지만, 결국 활발하고 인자하신 하원 이모님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모님은 4시부터 7시까지 돌봄이 가능했기에, 나는 그 일정에 맞춰서 앞으로의 행복 라이프를 구상했다. 8시 30분에 등원을 시키고 9시에 출근한 후, 난 6시 30분에 퇴근해서 7시까지 샤워를 좀 할 것이다. 그리고 7시에 이모님을 보내면 금방 9시가 되겠지? 완벽해! 나의 행복한 워킹맘 라이프!
당연히 내 마음대로 상황이 행복하게 돌아갈 리 없다는 건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엄마들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