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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경찰서로 달려갔다

술 취한 아빠를 집으로 모시고 가라는 경찰관의 전화

by 사적인 유디


6시 퇴근하자마자 같이 일하던 동료와 함께 회사 건물을 벗어났다.

같이 일한 동료의 본가는 창원인데, 그 날은 본가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직접 부산에 있는 회사 앞까지 데리러 오신 것이다.


동료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우리 딸”을 크게 외치며, 동료를 안아 주었고 그 모습을 보니 참 부러웠다.


6시 퇴근을 하기 전부터 내 폰에는 전화 몇 통이 왔었고, 아빠가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고 있으니 어떻게 좀 해보라는 술집 가게 아주머니의 연락이었다.

그 가게는 아빠가 자주 가는 술집이었고, 여러 번 난동을 피웠었기에 아주머니는 우리 가족 모두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때로는 우리 가족과 밥을 먹거나 함께 놀기도 하며 가까이 지내기도 했었다.)


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당장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 말씀드리고, 더 이상 연락이 없길래 바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버스를 탄지 10분 정도 되었을까 … 아빠 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경찰관이라고 한다.


지금 OO파출소에 아빠가 술에 취해 있으니 데려가라는 전화였다.

파출소와 우리 집은 다른 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보호자가 꼭 데리러 가야만 했는데, 그때는 집에서 놀고있는 오빠와 연락이 안되어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퇴근을 하자마자 경찰서로 달려갔고, 아빠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모시고 와야 했다.


누군가의 아빠는 창원에서 부산까지 딸을 데리러 오고, 사랑한다며 큰 소리로 반겨주었지만,

나의 아빠는 술에 잔뜩 취해서는 몸 하나 못 가누고 파출소에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가던 버스에서 내려 아빠가 있는 파출소로 향했고, 경찰관분들께 죄송하다 인사를 드린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의 기억은 현재까지도 나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지만, 아빠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기억도 잘 못했다.

나는 이날로부터 우울감이 극도로 심해졌는데, 나에게 상처를 준 아빠는 내가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채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한다.


출근을 하려면 그날의 파출소를 무조건 지나쳐야만 했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 이 곳을 지나칠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버스 안에서 몰래 울었던 것 같다.


왜 나는 이런 아빠 밑에서 자라와야만 했는지,

왜 나는 퇴근하자마자 술취한 아빠를 챙겨야만 했는지.


경찰관한테 전화가 온 거는 이 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빠가 쓰러져있다, 아빠가 길거리에 앉아 있다, 아빠가 술집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며 나보고 데려가라 했었고, 그럴 때마다 엄마, 오빠, 나는 항상 달려가서 데려와야만 했다.


이 마저도 아빠는 잘 기억을 못할 때가 있었고,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 몫이었다.


22년 12월 뇌출혈과 23년 10월 뇌경색으로 술을 마시면 안되는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빠는 최근에도 술을 많이 마시고, 경찰에게서 전화가 오게 만들었다.

경찰은 아빠가 술에 많이 취한 상태로 길거리에 있으니 택시를 태워 보내주겠다 하였고, 그렇게 아빠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빠는 오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났을 때였나 그 때 다시 아빠한테 전화가 왔었고, 전화를 받으니 이번에는 구급대원이었다.

아빠가 길을 걷다 크게 넘어졌고 이를 발견한 시민이 신고를 해준 것이다.


머리에 피가 났지만, 아빠가 병원을 가지 않는다고 하여 결국엔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구급대원은 아빠가 머리를 다쳤으니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신고를 달라 했고, 그렇게 떠났다.


창피한 것도 창피한 거지만, 너무 죄송스러웠다.

경찰관도 구급대원도 술취한 사람을 컨트롤 하기란 쉽지가 않을텐데,(심지어 취객을 상대하려고 경찰과 구급대원이 된 것도 아닐텐데) 우리 아빠는 몇 번이나 피해를 끼쳤으니 …

매번 그럴 때마다 죄송스러웠고 창피와 사죄는 가족의 몫이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만 반복하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며 사죄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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