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시리즈 2
도망친 곳에 낙원은 아주 높은 확률로 없다. 사람이 힘든 순간에 처해 있을 때 다른 선택지를 보게 된다면 그곳은 마냥 찬란해 보이겠지만, 도망친 곳은 완벽한 유토피아를 선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생각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장들 중 하나였는데
이 글을 쓰려고 찾아 보니 만화 ‘베르세르크‘ 의 결말부에 나오는 대사라고 한다! 그래서 넣어 봄
다시 돌아와서
거의 절대적 참이었던 이 문장의 의미는 지금의 나에게는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으로 다가온다.
물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장 자체만으로만 보면 참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평가절하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더 좋게 바라보곤 한다. 내가 저 선택을 했더라면, 내가 저 곳에 있더라면 정말 많은 게 바뀔 텐데 ~ 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자신의 앞에 펼쳐질 세계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다른 선택을 한다면? 저 햇살 쨍쨍하고 날씨 좋고 기분 좋은 저 공간에서 아주 환상적인 미래를 펼칠 수 있겠지 라는 무의식적인 기대감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장르 중 하나는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실제로 그 드라마들을 보면 어떤가.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지만 꼭 그 선택이 바뀐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는 지금 이 공간에서 일에서 관계에서 벗어나면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망친 곳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공간이고 웃고 울고 괴로워하는 또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말이 유독 좋았다. 어떤 힘든 일을 맞닥뜨려도 ’악깡버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 혹은 ‘존버 ( 나 버틴다)’ 의 정신을 마음에 아로새기며 여기서 도망치는 건 나의 무능함과 실패를 방증하는 것이며 낙원조차 찾을 수 없는 행동으로 여겼다. 어차피 낙원은 없는데 뭣하러 도망자까지 될까?
그러나 이 문장의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과연 이 문장은 여전히 참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문장의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제였다.
과연 모든 도망자들은 낙원을 상정하는가?
만약 그 사람의 마음이 불구덩이에 있다면 그 사람이 도망친 곳이 낙원이 아니더라도, 그저 안개가 짙게 낀 흐릿한 곳일지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불구덩이에 있는 사람에게 네가 도망치는 곳은 완벽한 유토피아가 아니니 그저 견디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문장의 의미는 나에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분명 낙원을 상정하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 역시도 막연히 이런 생각을 했던 때도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위의 문장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도망쳐도 그들이 생각했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힘듦을 맛보며 도망쳤다는 패배감과 부재한 낙원의 절망감을 견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지금 내가 불구덩이에 있다면 그건 나와야 하는 게 맞는 것이다. 설령 완벽하지 않은 곳이라 할지라도 혹은 나중에는 그곳에서도 다시 도망쳐야 할 지라도 우선 살고 보는 게 중요한 거지, 낙원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그것은 좋게 말하면 굳셈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둔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나 역시 ‘악깡버’의 정신으로 내가 처했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다가, 작년 하반기에는 이 정도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을 맞닥뜨렸다.
지금 내가 불구덩이에 있는데 어차피 (어디에도 없을) 낙원이 아니라고 여기서 무턱대고 버티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그래서 도망친 곳은 밴드였다. 슬슬 전공과 학회와 진로에 대한 생각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시기에 솔직히 밴드를 그만두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라도 숨을 트일 공간이 필요했다. 내가 이 밴드 활동을 한다고 해서 뭐 인지도를 쌓고 수익을 올릴 만큼 대단한 낙원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합주를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박자에 귀를 기울이며 드럼을 칠 시간이 절실했기에 그곳으로 도망쳤다.
글쓰기로 도망치기도 했다. 과제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도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무턱대고 글을 썼었다.
그리고 교환학생으로 도망쳤다. ! 2년을 학교에서 보내며 더 이상은 달릴 힘도 부족하고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했지만, 휴학을 하고 내가 스스로 계획을 세울 엄두가 나지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교환학생을 지원했다. 이 경우 도착 직후에는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낙원‘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데 꽤 애를 먹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선택적 도망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린 임시 결론은…. 적당한 도망은 나쁘지 않다는 것
그렇다고 도망이 능사라는 건 아니다. 내 경우 어느 한 곳에서 도망을 치기 위해서 다른 곳에 더 열심히 에너지를 쏟아붓기도 했다. 또한 모든 일에 도망으로만 응수하는 것은 낙원이고 뭐고 무책임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보면 어느 정도의 도망은 나를 지키는 하나의 책략이고 묘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큰 불길에 휩싸여 어찌할 바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잿더미가 되기 전에 일단 나와야 살 수도 있는데, 불구덩이에서 나와 봤자 낙원은 없으니 그곳에 있으라 는 말은 도망쳤다는 패배감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살리는 조언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망칠 때는 분명히 존재한다. 또 모든 사람들이 낙원을 꿈꾸며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도망이라는 키워드에 꽂혀 지나치게 패배감에 젖어들지 않았으면
그래서 소결론
적어도 도망칠 때를 알고 낙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도망은 꼭 필요한 방법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