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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미정 May 08. 2024

5월 8일 이상한 통과 칼

Étrange gourde et couteau

한국프뢰벨 『엄마와 함께 읽는 이야기 365일』 5월 8일 이야기


코사크 청년 이봐인은 강가를 가다가 물에 빠진 노파를 만났습니다.

Yvoyne, un jeune cosaque, se promenait le long de la rivière lorsqu'il rencontra une vieille femme qui s'était noyée.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À l'aide! à l'aide!


노파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hurle la vieille femme en s'enfonçant dans l'eau.


할머니! 잠깐만 기다려요.

Madame! Attendez une seconde.


이봐인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노파를 건져 주었습니다.

Il retourne dans l'eau et sort la vieille femme de l'eau.


에구, 고맙기도 해라. 내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뭘로 갚을까?

Oh, merci. Je veux vous remercier de m'avoir sauvé la vie... Que puis-je faire?


노파는 중얼거리면서 조그만 물통 하나를 이봐인에게 주었습니다.

murmura la vieille femme, et lui donna une gourde.


내가 가진 건 이것뿐이라오. 갖고 가요.

C'est tout ce que j'ai, prenez-la.


할머니, 괜찮아요. 저희 집에도 물통은 많이 있습니다.

Madame, c'est bon, on en a plein à la maison.


아니라우, 이 물통은 신기한 요술 물통이야. 오른쪽으로 돌리면 성이 나오고 왼쪽으로 돌리면 성이 사라지는 걸. 자 어서 받아요.

Celui-ci est un seau magique. Si vous le tournez vers la droite, un château apparaîtra, et si vous le tournez vers la gauche, le château disparaîtra. Tenez, prenez-le.


마녀 노파는 물통을 이봐인에게 주고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Elle le lui donne et disparaît dans les airs.


이봐인은 강가를 지나 산길로 들어갔습니다.

Yvoyne passe la rivière et entre dans la sentier de la montagne.


나리! 배가 고파 죽겠으니 먹을 것 좀 주십시오. 나리, 오늘 밤에는 잘 곳도 없습니다.

Monsieur, je suis affamé, donnez-moi quelque chose à manger. Monsieur, je n'ai pas d'endroit où dormir ce soir.


거지 노인이 풀밭에 엎드려 애원했습니다.

Le vieux mendiant s'allongea sur l'herbe et supplia.


할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오늘 밤에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Monsieur, ne t'inquiète pas. Je prendrai soin de toi ce soir.


이봐인은 물통을 돌려서 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지 노인을 성 안으로 초대했습니다.

Yvoyne retourna la gourde pour en faire un château et invita le vieux mendiant à entrer.


아이고, 이렇게 고마운 청년이 또 있을라고.

Quel jeune homme reconnaissant!


거지 노인을 칼 한 자루를 이봐인의 손에다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Le vieux mendiant mit une épée dans la main d'Yvoyne et lui dit,


이 칼은 손에 들기만 하면 뭐든지 산산조각이 나는 신기한 칼이랍니다. 이걸 줄 테니 가져가구려. 자, 받아요.

C'est une épée  magique qui brise tout sur son passage. Je te la donne, prends-la. Tiens.


할아버지, 칼은 제 집에도 있어요.

Monsieur, j'ai aussi une épée chez moi.


허허, 집에 있는 칼 하고는 다른 칼이니 받아요.

Il n'est pas comme l'épée de la maison, alors prends-le.


할아버지. 그럼 제 물통하고 바꿔요.

Monsieur. Alors échangeons-la contre ma gourde si non.


이봐인은 물통과 칼을 바꾸었습니다.

Yvoyne échange la gourde contre  l'épée.


이봐인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왔습니다.

Cela fait longtemps qu'il n'a pas visité sa maison natale.


도둑이다, 도둑 떼가 쳐들어온다. 도둑이다!

Voleurs, une bande de voleurs arrive. Voleurs!


도둑 떼들이 이봐인의 고향 마을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봐인은 칼을 뽑아 들면서 소리쳤습니다.

Une bande de voleurs est entrée dans le village natal d'Yvoyne. Il tire son épée et crie.


도둑들아! 물러가거라!

Voleurs, battez en retraite!


이봐인의 고함소리와 함께 도둑들의 목이 가을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À ce cri, les têtes des voleurs tombèrent comme des feuilles d'automne.


이봐인 장군 만세! 이봐인이 고향을 구해 냈다!

Vive le général Yvoyne! Yvoyne a sauvé sa ville natale!


고향 사람들은 이봐인을 영웅으로 모셨습니다.

Les habitants de sa ville natale l'ont acclamé comme un héros.


이 소식을 들은 임금님은 이봐인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나라를 지키게 했습니다.

Lorsque le roi apprit la nouvelle, il lui donna un rang élevé et le chargea de défendre le pays.


이봐인은 공주와 결혼을 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Yvoyne épousa la princesse et ils vécurent heureux jusqu'a la fin des temps.



#한국프뢰벨 『엄마와 함께 읽는 이야기 365일』

5월 8일 수요일 이야기




#코사크 : 현재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영역에 있었던 동슬라브계 민족집단


영어: Cossack(코사크)

우크라이나어: Козаки(코자키)

러시아어: Казаки(카자키)


어원: 튀르크어 '얽매이지 않은 자들'이란 뜻의 카자크(Qazaq)


cf. 중앙아시아 카자흐족: 카자키와는 이름만 비슷할 뿐임, 튀르크계 민족집단



실제로 말 탄 무장농민, 무장상인들도 죄다 카자크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혼란 시대에 러시아 의용병으로 수많은 카자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그냥 농사일하다가 자기 고향이 침략받자 무기 들고 말 타고 나온 농민들이었다. 하도 전쟁이 잦으니 그냥 일반 평민들도 전투민족화된 것. 반면에 이교도인 오스만으로부터 돈 받고 동포들을 공격하던 용병 카자크, 무력을 바탕으로 주변 읍촌민들로부터 조공을 받던 마적단 카자크, 수많은 농노와 재물을 소유한 봉건귀족/지방군벌 격인 카자크도 있었다. 사실상 러시아 제국이 이들을 체계화하기 이전 시기에 엄격하게 정의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자키의 형성 과정에 대한 정론은 몽골의 서방 침공으로 루스계 국가들이 몰락하여 현 우크라이나 일대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몽골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도 전에 오늘날 우크라이나 땅은 각종 유목민족과 루스계 국가들 간의 내전과 이합집산으로 이미 개판 5분 전이었다. 그렇기에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에도 광활한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서 예속과 착취를 피하며 반유목적 삶과 때로는 약탈을 영위하며 이후 등장할 코자키의 원형이 될만한 집단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설명은 꽤 개연성이 높다. 몽골의 침략과 키예프 루스의 몰락, 그리고 뒤이은 몽골 제국의 분열은 우크라이나 일대에 존재하던 코자키 집단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만한 규모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중반에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 뒤를 이어 몽골인들이 세운 킵차크 칸국(금장칸국)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약화되었고, 여러 후신 칸국들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우크라이나 일대는 일종의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스텝 지대에 맞닿아 있는 드니프로강 유역 일대에서는 주변의 여러 국가와 세력 간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이전투구 끝에 최종적으로 드니프로강 유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남동부 변경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지역에 아직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했고 우크라이나 일대는 사실상 여전히 열려있는 국경지대로 남아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부터 모스크바 공국에 이르기까지 동유럽 일대에서 봉건제도가 빠르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농노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 루스계 농민들을 비롯하여 봉건제적 신분질서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사회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열려 있는 국경지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변경인 드니프로강 하류 지역, 즉 자포리자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유입된 인구가 현지의 코자키 집단에 합류하면서 코자키의 세력은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코자키는 종전의 단순한 유이민 집단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확고한 사회로 조직화되어갔다.



이렇게 살던 코자키 집단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스텝 지대에 원래부터 살던 원주민들과 모스크바 대공국폴란드 왕국 등 여러 지역에서 정부와 지주의 억압을 피하고자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스텝으로 들어온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즉 드니프로강 하류 지역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했다. 인근의 크림 타타르인들의 침략 때문에 재산을 가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유목도 겸했으나,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가 매우 비옥하여 농사가 쉽고 소출이 높다보니 농업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크림 칸국오스만 제국이 계속해서 심각한 위협을 가하자, 이들 '자유인 집단'은 자체적인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포리자 코자키가 본격적으로 역사속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5세기이다. 이 시기를 보통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시대, 짧게 카자크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16세기 중후반 즈음에 이르면 코자키는 드니프로강 하안 지대를 확고히 장악한 채 명목상으로 폴란드 왕국의 신민이지만 실제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조직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코자키는 이 당시에 이미 폴란드 정부, 크림 칸국이나 심지어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같은 주변세력들과 교섭 또는 협력을 하거나 무력분쟁에 참여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몽골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발생한 힘의 공백과 이어서 벌어진 여러 국가간의 각축전, 그리고 동유럽 일대에서 급속히 진행된 봉건화라는 두 현상이 맞물리면서 코자키가 급속히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전투민족


기마에 능했으며 매우 용맹하고 난폭하고 상무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자 카자크들이 그러했다. 그렇지 않으면 튀르크계 유목민인 크림 타타르족이 상습적으로 약탈과 납치 및 인신매매를 벌이는 체르노젬 대평원에서 농토를 지키며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림 타타르족의 주요 수출품은 오스만 술탄과 고관들의 하렘에 납품되는 슬라브인 여자 노예였다. 정확히는 방어를 잘해서 지킨게 아니라 똑같은 방법으로 타타르족을 습격해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버리는 방식으로 지킨 것이었다. 거기에 방해가 되면 같은 슬라브인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슬라브 민화에 카자크 캐릭터가 등장할 경우 대개 원맨 아미급의 해결사로 묘사된다. 쵸르트(악마)나 레쉬(슾 정령)들이 깽판을 치는 시골 마을에, “차르의 군대”에서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가던 카자크가 들러 하룻밤만에 모든 악마들을 해치운다는 전개는 슬라브 민화의 클리셰 중 하나다. 그 무섭다는 마녀 바바 야가도 카자크 병사에게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 물론 민화는 창작물이지만, 슬라브 민족들이 카자크 전사들에 대해 갖고 있는 전반적인 인식이 어땠는지 반영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의 용맹함은 러시아의 시베리아의 개척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16세기 이후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가 이들을 앞세워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몽골계 유목민족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정복해 나간 것이다. 예니세이스크, 하바롭스크, 토볼스크 등의 시베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들이 요새화한 정착지에서 기원하며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가 이끄는 카자크 부대는 1581년 사설원정대 주제에 시비르 칸국의 수도까지 정복해 시비르 영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극동을 개척할 때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것도 코사크였다.



더군다나 기마민족답지 않게 해적질에 나선 적도 있다. 사하이다치니가 수령으로 있었던 17세기 초엔 '차이키'란 소형선박을 300척 가량 건조한 후 그 선박을 가지고 흑해를 휩쓸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근교까지 약탈하고,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이 운영하는 흑해 최대의 슬라브 노예 거래소를 털면서 그 곳을 지키던 14,000명의 병력을 몰살시켜 버릴 정도로 활약하는 통에 흑해는 한때 '카자크의 바다'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


카자크, 그중에서도 특히 돈 카자크는 한국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던 유럽계 민족 집단이다. 상술한 대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및 극동 지역 확장에 돈 카자크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선봉에 섰기 때문이었다. 당장 17세기 나선정벌 당시 조선과 맞붙었던 러시아 병사들이 카자크였고, 19세기 말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이후에는 다양한 사유로 조선과 카자크의 접촉이 늘었다.



경제적으로는 함경도연해주의 커넥션이 더욱 깊어지면서 조선인들과 러시아인들의 인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단적인 예로, 함경도에서는 카자크들의 전통춤인 '고팍'이 유행해 어린아이들까지 따라했을 정도였으며, 한편으로 카자크들은 국경에서 곡식이나 군마, 소 등의 생필품들을 사 가고는 했다. 코르사코프 동시베리아 총독이 보았을 때, 유럽에서 식량을 가져오는 것보다 가까운 조선에서 식량을 사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도 제대로 개통되지 않은 미개척지에서 유럽산 식량만을 멍하니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매달 250~300마리의 소들이 조선에서 수입되었고, 1895년 한 해에는 밀매된 분량까지 합쳐 40,000마리 가량이 러시아에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하면서 카자크의 이웃이 되었다. 단적인 예로, 아무르 지역 최초의 고려인 마을인 블라고슬로벤노예는 시넬니코프 총독의 명령으로 이주된 조선인들이 카자크로부터 임차한 31 데사티냐의 땅이 기원이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당연히 함경도 지방군과 러시아 제국군 간의 국지전이 때때로 벌어지면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이 당시 한양에서 돈 카자크들의 악명은 유럽 못지않았다. 다음은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밝힌 증언이다.


아라사의 서북부에 가살극(코사크)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납고도 악독하여 구라파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와전되어, '가살극 사람들은 퇴화되지 않은 꼬리가 있으며, 사람 고기를 식량으로 삼는다'고 소문났는데, 그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토를 짓밟으며 남하하였다. 안주의 어느 백성이 암말을 잡아매고 편자를 박다가 갑자기 돌아다니던 아라사 병사를 만나자 말을 미처 풀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아라사 병사들이 이 암말을 보더니 돌아가며 음란한 짓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가살극인데 성품이 가장 음탕해서, 부녀자를 만나면 늙었는지 젊었는지도 묻지 않고 문득 범한다.
숫양처럼 하루에 수십 번이나 교합하므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부녀자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은 또한 의심이 많아서, 늘 약탈하다가도 네댓 명이 모여있는 것을 보면 침입하지 못하며, 먹을 것을 보면 소나 말처럼 반드시 생채로 씹어먹었다. 그들은 말도 잘 타서 한번 휘파람을 불며 달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 리를 달렸다. 용모가 비록 사납게 생겼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만나도 죽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부드러운 빛을 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이를 가는 자는 오직 왜놈뿐이었다.
이때 왜군은 황해에 퍼져 있으면서 자기 나라의 식량과 기계 운반 말고는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배를 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분장하여 평안도 지방을 드나들며 아라사를 정탐했는데, 아라사가 그것을 알고 엄히 수색하여 머리 깎은 자를 보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래서 스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방한모를 썼는데, 아라사 군사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칼 끝으로 모자를 벗겨 머리를 깎았는지 아닌 지를 조사했다.

-《매천야록》, 황현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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