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다자키 쓰쿠루의 ‘생존’ 수영
깊은 우울이 한풀 꺾이고 나면 그때가 어쩌면 가장 위험하다고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무기력의 상태에는 죽음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조차 귀찮지만, 그 시기가 한 차례 지나가고, 온몸에 다시 에너지와 활력이 생길 땐 죽음을 실행하는 데까지 나아가 버릴 수 있는 추진력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한 시즌’의 우울을 견뎌냈다. 우울을 시리즈로 체험하는 나도 시즌이 끝나갈 때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마법처럼 생긴다. 그길로 벌떡 일어나 엉망진창이 된 집구석을 청소한다. 왠지 지금부터는 비로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의지가 샘솟는다.
내일은 꼭 빨래를 해야지!
내일이 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딱딱한 방바닥에 옆으로 누워 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있다. 나는 이 방바닥까지도 지금보다 더 많은 범위를 누릴 자격이 없다.
아, 이번에는 진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역시 실패하는 사람이구나. 처참하게 무너진다. 사실상 ‘빨래 실패’라는 것은 내가 해내야 할 중요한 일들(예를 들어 매복 사랑니를 4개나 빼내야 하는 무시무시한 일 등)에 비하면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지만 이 별일 아닌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에 나는 이전 시즌의 우울보다도 더 뿌리 깊은 우울감을 느낀다. 곧, 진화된 우울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된다.
하루는 암모나이트처럼 몸을 접어 새 우울 시리즈의 예고편을 찍던 중 소름 끼치는 경험을 하였다. 죽음을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던 시즌에는 찾아볼 수 없던 ‘기운‘과 ’힘’이 지금, 새로운 무기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까지는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나 스스로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무서웠다. 새로운 시즌을 맞이할 때 이런 징조는 여태껏 없었다. 이 용기를 멈출 수 없게 될까 두려웠다. 무엇이든지 딴짓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책장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꺼내 읽었다.
죽음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순수하여 죽음의 직전까지 다가갔으나 죽음을 시도하지는 않았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 쓰쿠루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긴 선을 밟아가는 무채색의 나날들. 그것은 아슬아슬한 ‘연명’에 가까웠다. 뚜벅뚜벅 걷다가도 선 밖으로 한 발짝만 내딛으면 곧바로 죽음에 도달할 수 있어 보였다. 그리고 쓰쿠루도 어쩌면 그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칼날 같은 선 위를 결코 벗어나는 일 없이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수업을 듣고, 스스로 밥을 해 먹었다. 나는 쓰쿠루의 삶을 통해 나도 경계선 상에 있지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칼날 위를 걷는 일에도 멈춤이 없는 쓰쿠루와는 달리 나는 경계선 상에서 밖으로 떨어질까 봐, 어느 한쪽으로 넘어질까 봐 길을 걷지 못한 채 멈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좋은 삶을 향해서 당차게 걸어 나가고 싶다. 그렇지만 그쪽으로는 몸이 잘 나아가지 않는다. ‘뚝딱거린다’는 요즘의 표현이 딱 맞다. 어느 시도를 하든 몸이 굳어 걸음걸이가 영 엉성해지고 뚝딱거리기 일쑤다. 경계선 위에서 홀로 넘어질 듯 말 듯 비틀거리는 상황이 반복된다. 자꾸만 마음이 불안하고 머리는 빙빙 돌고, 이 어지러움을 멈추기 위해 차라리 나머지 하나의 선택지로 몸을 돌려버릴까 고민한다. 나의 마음이 삶의 반대편으로, 다시 말해 ‘죽음’으로 기우는 것은 현실의 강한 욕망이 잘 실현되지 않아 이젠 몸도 마음도 어지럽지 않은 곳을 선택하고 싶은 것이다.
‘죽고 싶다는 건 정말 잘 살고 싶다는 것'(이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이라는 흔한 말처럼 위와 같은 모든 과정이 ‘삶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반작용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앎이 살고 싶은 나의 의지를 확인시켜 줄 수는 있어도 뚝딱대는 내 몸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정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책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쓰쿠루는 왜 죽음까지 도달하지 않았을까?‘ 일평생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쓰쿠루, 그는 과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소설은 이 물음의 답을 명시적으로 알려주지 않지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알 것 같았다. 쓰쿠루의 유일한 도피처,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서 쓰쿠루가 ‘죽음’ 쪽으로 몸을 틀려할 때면 그를 다시 정방향으로 되돌려 놓았던 것.
바로 수영이었다. 쓰쿠루의 일상에서 수영은 절대 빠지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에는 특히 더 물속에서 그는 고민을 해결하곤 했다.
나는 쓰쿠루의 살아남기 방식이었을 ‘수영’을 한번 따라 해 보기로 했다. 당장 ‘멋진 삶’을 향해 몸을 돌려 당당히 모델 워킹을 걸을 자신은 여전히 없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수영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살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며 만들어진 ‘삶에 대한 반항심’이 더 위험한 용기를 만들지 않도록 우선은 경계선 위에서 잘 ’살아남기‘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쓰쿠루는 수영이라는 수단을 통해 죽음에 대한 진심 어린 열망을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물속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헤엄을 칠 때, 그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나 또한 다자키 쓰쿠루처럼, 삶과 죽음의 가운데에서 안쓰럽지만 대견하게, 그렇지만 누구보다 꿋꿋하게 삶을 연명하고 싶다. 그래서 수영을 시작한다. 나도 그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훌륭하게 걸어 다닐 수 있기를, 언젠가는 수영이 나의 도피처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