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이미지 : 지난주 내 글이 Brunch Editor's Pick에 선정되었던 화면.)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애초에 계획했던 이야기의 절반을 작성하게 되어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려고 합니다. 현재 제가 작성 중인 '미국 추억 이야기'가 50% 넘게 진행된 것을 기념하여 그동안의 글쓰기를 얘기하려 합니다. 아래의 참고 글들을 먼저 읽어보시면 이번 이야기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 글쓰기 초보가 9개월 차 브런치 작가가 되기까지
이과, 공대 출신 아저씨인 나는 글쓰기와 관련 없는 인생을 수십 년 살아왔다. 일기는 고사하고 블로그나 인스타그램도 하지 않고 싸이월드도 하지 않았었다. 아주 오래전 학교를 졸업한 이후 긴 글을 써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 직업은 글 쓰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고 글쓰기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러던 내가 우연한 기회로 2년간 미국살이를 하게 되고, 여행하고 경험한 것을 PPT로 남기고, 그 PPT를 미국 사람들과 공유하며 어울려 지내고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온 후, 40여 개의 PPT에 담긴 이야기를 글로 풀어쓰면 좋겠다는 조언을 받아 브런치에 도전한 것이 이 여정의 시작이다.
내가 미국 추억을 글로 써서 남겨야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미국에 두고 온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은 또렷해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기 마련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과의 추억을 영원히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PPT가 있으니 써야 할 이야기는 대충 정해진 셈이어서 브런치 작가 신청 자체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붙든 말든 나의 이야기를 꿋꿋이 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서랍'에 글이 10편쯤 쌓였을 때 작가 신청을 했는데 다행히 한 번에 통과되었다. 사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내 글을 남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뿐? 나는 그저 애초의 목표대로 가던 길 가면 된다.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 아내는 글과 사진에 자신이 등장하고 있는 데도 그저 묵묵히 'Like'를 눌러주는 나의 1호 구독자이다. 10월 성수동에 브런치 팝업 스페이스가 오픈했을 때 아내와 단 둘이 갔다. 골방에 처박혀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남편은, 아마도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님들처럼 훌륭하게까지는 되지 않겠지. 그래도 그분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아내는 바로 건너에 있던 빵집(Standard Bread)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직 낯 간지러운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은 당신 덕분이오. 남은 여정 잘 마치고 조만간 다시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겠소."
(사진) 지난 10월 방문한 성수동 브런치 팝업 스토어 / 작가 워크북과 작가 카드 / 입장 손목 팔찌 (아내와 함께)
2. 내가 쓰고 싶은 글? 남에게 읽히고 싶은 글?
나의 글은 출판 또는 기타 상업적 활동을 감안하고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겐 그런 경험도 없고 충분한 깜냥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기회가 온다면 참 신기한 일이긴 하겠다. 개인 소장 및 미국 친구들에게 보낼(+영문 번역까지 의뢰해서) 분량 정도를 자비출판 할 생각은 있다.
전문가가 아니니 글쓰기 노하우를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유하려고 한다. 이 또한 내 인생이 지나온 길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나만의 글 쓰기 루틴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2년에 걸친 일들이다. 나는 이것을 6개월 단위로 4등분하여 각각 20여 개의 목차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현재는 3쿼터에 해당하는 기간의 글 목차를 미리 만들어 두고 작성하고 있다. 해당 목차의 글을 다 작성하면 그다음 6개월에 대해 목차를 다시 작성한다. 목차 작성에 드는 시간은 하루.
여행기가 글의 절반 이상이기 때문에, 첨부할 사진 먼저 고르고 캡션 달면서 글을 구상한다. 이미 2년 가까이 지난 일들을 기억해 내서 써야 하기 때문에 그 당시 찍었던 사진을 전부 보면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진 고르기가 완료되면 키워드 또는 단순한 목차 형식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열하며 적는다. 나중에 어떤 문장으로 쓸지 생각하지 않고 최대한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적는다. 이렇게 글 한편에 대해 '사진 + 키워드 작업'이 보통 하루치 일이다. 여기서 바로 본문을 작성하지 않고 생각의 리프레쉬를 위해 본문은 다음날부터 쓴다.
아무리 PPT가 있고 키워드 작업을 잘해도 본문을 작성하는 건 백지위에 그림을 그리듯 막막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글의 1회분 분량이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고, 적어 놓아야 나중에 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항상 충돌한다. 마음속에 있는 독자의 이미지가 '후임 주재원'으로 설정되어 글이 길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본문 작성은 가능하면 이틀 안에 끝내려고 노력한다.
10편 정도가 항상 '작가의 서랍'에 있기 때문에, 지금 발행되는 글은 실제로는 2달 전에 작성된 글이다. 작성 2달 뒤에 읽어보면 그때는 못 봤던 오타나 이상한 표현들이 눈에 띈다. 글 작성 직후 퇴고를 하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 시간을 충분히 들여 퇴고를 꼭 한다. 그래도 많이 놓쳐서 발행하고 나서 수정하는 경우도 많다.
브런치북이 아닌 매거진에 1주일에 최소 한 번은 발행한다. 이제껏 한주에 두 편 발행한 적은 있어도 연재를 미룬 적은 없는데 작가의 서랍에 여러편을 미리 써 놓은 것의 장점이다. 브런치북보다는 매거진이 형식상 조금 더 유연하다. 매거진은 편수에 제한이 없고 나중에 브런치북이 될 수 있지만 브런치북은 최대 30편 제한인 데다 발행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 필요하다면 재편집을 통해 브런치북으로 만들 생각이다.
글의 구상부터 발행까지 4일 정도는 필요하다. 이제 겨우 절반 썼으니 완주를 위해서는 조금 더 부지런히 써야 한다. 25% 기념글에서는 올해 안에 완주하는 것을 목표했는데 어느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목표가 되어 가고 있다.
브런치 차트를 통한 조회수 분석
아무리 내가 쓰고 싶어 쓰는 글이라 해도 다수에게 공개되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나의 일기 같은 것으로 남겨지는 걸까?
브런치 작가 메뉴에서는 '통계'를 통해 월별, 일별, 글별 조회수를 보여준다. 아래 그림은 나의 9개월간 조회수 그래프인데 지금까지 총 6,950번의 '읽음'이 기록되어 있다. 상당히 소소해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고맙게도 누군가 나를 꾸준히 찾아와서 글을 읽어준다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은 글쓰기에 상당한 동기부여가 된다.
(사진) 월별 주회수 통계. 8월과 11월에 각각 한편씩 다음 및 브런치에 선정되어 조회수가 평소에 비해 많이 늘었다. 꾸준히 쓰면 글의 개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면 점진적으로 조회수가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다행히 나도 그 경향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니 적어도 불량 작가는 아닌 셈이다.
그래프에는 2개의 Peak가 보이는데 이것은 Daum.net과 Brunch 메인에 내 글이 선정되어 노출되었을 때이다. 참고로 글이 선정되어도 알림 같은 건 없다. 하루 조회수가 급증하면 어딘가에 노출된 것이니 내 글이 어디 노출되었는지 열심히 찾아야 한다. 스크린숏이라도 찍어야 하니까.
8월 Peak의 영향으로 9,10월 조회수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Excel을 이용해서 특이점인 8월을 제외하고 data 추세선을 그어보면, 2월부터 시작된 조회수 경향의 연장선에 9,10월 data가 있음이 확인된다. (월평균 증가량 87건, R2=0.99) 이 말은 이 글이 8월에 Daum에 노출되었던 효과는 1회성이었고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주는 것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해당 글은 미국에서 생활 정보를 얻는 방법에 대한 정보성 글이었는데 구독자도 Like도 큰 변동은 없었다. 기분은 좋았던 일이지만 거기까지였다.
(왼쪽) 일간 조회수. 에디터 픽으로 선정된 효과는 1주일간 지속되었다. (오른쪽) 글 별 조회수. 전체 46개 글 중에 첫 글보다 조회수가 높은 글은 12편이다. 월간 차트의 두 번째 Peak, 불과 지난주였던 11월의 Peak을 일간 조회수(상단 왼쪽 그림)로 보면 평소 조회수 15~49건에 비해 11월 5일에 급증한 것이 보인다. 이 글은 당시 Brunch App의 Editor's Pick에 노출되었고 그 효과는 1주일간 지속되었다. 노출 자체가 1주일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은 미국에서 한국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대한 내용인데 의미 있는 신규 구독자 증가가 있었고 전체 조회수도 8월 노출에 비해 훨씬 많았다. 날짜별 인기글을 볼 때, 이 글을 보고 찾아온 분들은 지난 글까지 모두 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8월 노출과 11월 노출은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글 조회수 랭킹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사람들의 관심사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첫 글보다 조회수가 높은 글들을 정리해 보았다. 첫 글보다 조회수가 높은 글은 적은 시간에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서다. (첫 글보다 노출 시간은 짧은데도 많이 조회된 것이니까. 첫 글의 일평균 조회수 0.47건 보다 높은 글들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글은 5월에 쓴 뉴욕 운전면허 취득기였다. 구글에서 '뉴욕 운전'으로 검색하면 최상위에 나오는 글이기 때문에 매일 평균 8건 이상의 조회수가 발생한다. 운전에 대한 정보를 보충하기 위해 쓴 글도 '뉴욕 운전' 검색 상위이기 때문에 매일 4건 이상은 누군가 읽는 글이다. 이런 정보성 글은 특정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글이 검색 순위를 바꾸지 않는다면 현재의 추세대로 계속 조회될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개의 글로 하루 조회수 10건이 확보된다.
그 외의 글들은 모두 미국 일상에 대한 글이다. 사람들은 미국 정착 과정이나 학교 상담 같은 현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궁금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8월에 노출된 정보성 글보다 11월에 노출된 인간관계 글이 더 관심을 끌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를 볼 수 있는데, 내가 작성한 글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행기들은 하나같이 순위에 없다는 점이다. 여행기는 해당 지역에 대한 사전 호감/배경지식 등이 없으면 굳이 찾아서 읽는 주제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글을 재미있게 잘 쓰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이제껏 미국 대도시를 여행한 글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조회수가 적다고 해서 써야만 하는 여행기의 비중을 줄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에 있을 때 현지인들에 비해 많은 여행을 다녔던 것 그리고 그것을 PPT로 만들어서 공유했던 일이 미국 이웃의 마음을 열게 했던 중요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분석에 따라, 일상에 대한 기록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좀 더 세심히 잘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또 하나의 글이 Daum 여행 섹션에 노출되었다. 이게 웬일이람. (미국 식당 Tip의 현실)
3. 외롭고 먼 길, 글쓰기 여정의 동기부여
시간이 두 배 된다고 해서 글이 두배로 나오지는 않아.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쓸 때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출퇴근하면서 눈 감고 있어도 글 쓰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 1회 연재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휴직을 하면 주 2회 연재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그렇게 덧셈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 같은 글쓰기 초보에게는 불가능했다.
정해진 글을 빨리 써 버리고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계획보다 빨리 써지는 일은 없고 항상 늦어지는 것만 같다. 원하는 대로 써지지 않으니 휴직을 괜히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아내는 야근하며 돈 벌고 있는데 나는 허송세월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다. 이런저런 부담에 키보드에 손가락 올려놓은 채로 1주일을 통으로 아무 글도 쓰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상황 개선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니 역사에 남을 대작을 쓰는 게 아니다. 가볍게 기록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밝은 마음을 갖자. 유명 작가들과는 다르게, 나에겐 어떤 내용으로 써야 할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고 아이도 봐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생각의 틈을 만들어 둘 시간도 필요한 것 같다. 좀 쉬면서 해야겠다.
하지만 마음을 가벼이 하겠다고 해서 침대에 누워서 넋 놓고 있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머릿속에 생각의 틈이 만들어지는 동안 내 몸에 게으름이 들러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 쓰기 외에도 집중해서 할 일이 필요하다. 몇 달 전부터 집에서 혼자 매일 1시간씩 하고 있는 운동은 글쓰기보다 우선이다. 매달 한 권 이상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내가 구독하고 있는 다른 브런치 작가들의 글도 빼놓지 않고 읽어본다. 미국 이야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미국에서 듣던 Albany Local 라디오를 들으며 작업한다.
추억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을 선택했으니 가장 중요한 건 끝까지 완주하는 것, 기록을 마치는 것이다. 절반이나 왔으니 나머지 절반도 충분히 갈 수 있다. 스스로 좌절하지 말고 힘내자.
글 쓰는데 힘이 되었던 것들
조회수 못지않게 Like도 작가의 기분이 좋아지게 한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해도 매번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구독자가 아닌데도 발행을 클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와서 Like를 주고 가시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알고 오시는지 신기하다. 다른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어봐야겠다는 자극이 되는 분들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응원해 주고 꾸준히 읽어주고 Like까지 주고 가는 친구들도 고맙기는 마찬가지다.
(왼쪽) 8월 Daum.net에 노출되었던 나의 글 (가운데) 11월 Brunch App에 노출되었던 나의 글. (오른쪽) 글 작성 중 Daum에 노출된 글 앞서도 얘기했지만 Daum과 Brunch에 세 번이나 글이 선정되어 노출된 것도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노출 한 번에 조회수 수만 건인 작가님들도 있어서, 나 정도가 유명세를 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친구들에게 자랑 거리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모든 글을 다 쓰고 나서 다시 회사원 아저씨로 돌아가면 흐뭇했던 추억이 되겠지.
아직은 아빠의 구독자가 아니지만 언젠가 구독자가 되어주길 바라는 내 글의 주인공 세은이도 아빠를 응원해주고 있다.
혼자 방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가끔 아무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혼자 떠들고 있는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주변에 글쓰기의 고통을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외로움과 고독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런 긍정적 동기부여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룬 것이 누군가에겐 시시하고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껏 살아온 나의 인생에선 처음 맛보는 즐거움이다.
글 쓰는데 힘을 내도록 자극이 되었던 일
브런치를 막 시작할 때쯤 글쓰기 관련 오픈채팅방 하나에 가입했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주고받는 말에서 예의 있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글 자체에 대한 의견도 주고받고 각종 응모 전, 출판 등에 대한 정보도 오가는 곳이라서 유용하다. 이곳에서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가끔 글을 공유하고는 했다. 내 글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듣고 싶고 내심 조회수와 구독자가 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글을 공유하자마자 R로 시작하는 닉네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해외 생활 30년째인 출간 작가라고 소개했다. 말을 걸어준 게 반가워서 "저는 미국 이민 이야기를 써요. 2년 살다 얼마 전에 한국 왔어요."라고 했더니 "고작 2년 살다 온 걸로 이민이라고 하면 안 되죠. 그냥 여행, 체험한 거예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여기서도 자신의 기준으로 벽을 치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사람을 만났다.
그래서 과연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쓰시는지 닉네임을 검색해서 글을 읽어보니 몇 달 전에 운전면허 딴 글, 해외에서 편의점 알바에 도전했다가 며칠 만에 그만둔 내용이 최근 글이다. 허허...
해외 경력 30년인데 편의점 알바 구하시는, 그것마저 결국 실패하신 분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을 쉽게 판단하고 규정짓는 걸까? R 역시 글에 적지 못한,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한 인생의 굴곡이 있을 거라 생각은 들지만 그쪽에서 먼저 내 인생을 재단하니 나도 R을 재단하고 싶어 진다. 본인의 이민 2년 차에는 이뤄 놓은 일이 하나도 없어서 남의 인생도 그렇게 보이는 걸까. R의 황당한 발언에 누군가 개인톡으로 말을 걸어서 위로해 주었는데 고마웠다.
R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주관을 주입하려 했다. 누군가 공유한 도쿄 이자카야의 개인적 경험에 대해 "이자카야는 그런 음식 파는 데가 아닌데 왜 그런 걸 먹나요?"라고 하거나 누군가의 글에 대뜸 맞춤법이 안 맞아서 못 읽겠다고 하는 등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종종 있었다. 본인은 그것을 팩트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실제는 그저 무례해 보일 뿐이었다. R의 지적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고마워하지도 않았으니까.
글쓰기를 막 시작해서 채팅방에 달려와서 신나 있던 사람들도 R의 드잡이에 걸리면 바로 조용해지거나 방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R은 욕설을 하는 것도 아니고 때때로 예의 없을 뿐이라서 관리자 차원의 제재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다른 피해자들처럼 R을 차단하고 더 이상 오픈채팅방에 글을 공유하지 않게 되었다. R이 만들어 내는 부정적 감정에 휩쓸릴 이유는 없었다.
내가 그런 빌런에게 봉변을 당한 것은 어쩌면 조회수나 구독자 수에 혹해서 가벼이 행동해서 벌어진 일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작은 이득, 사실 이득도 아닌데.
이런 류의 일은 내가 더욱 처음 생각했던 이 여정의 본질을 되짚어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쉽게 흔들리지 말고 완주해야 한다는 그 초심말이다.
4. 앞으로 남은 여정
나는 미국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던 사람이었고 글을 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 인생의 아주 소중한 한 조각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기억 너머로 떠내려 갈까 봐 브런치 작가라는 새로운 여정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9개월 넘도록 그 여정의 절반을 무사히 왔고 이제는 나머지 절반을 가야 한다. 이 여정의 후반전에 같은 시간, 노력이 들게 될지 아니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끝까지 가야 한다.
인생은 연속적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경험과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나의 내일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여정을 완주해야 다음 여정도, 또 그다음도 무사히 마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지금의 미국 추억 글쓰기를 완주하고 나면 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의 내 모습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나 스스로도 궁금하다.
글 여행을 마친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닐 것이기에, 또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전반전이 무사히 종료된 것에 지금까지 내 글을 읽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