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빵순이의 내 마음을 훔친 빵
빵이 있는 곳엔 슬픔이 없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간과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배를 채울 때, 잠시 동안 빵순이는 이기적이고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며, 빵을 먹는 고독한 행위. 이 행위야 말로 빵순이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활동이라 할 수 있다(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오프닝 내레이션의 변용)."
지금 당신의 빵에게 투표하라!
나야 나, 단팥빵!
"무슨 빵을 좋아하세요?"
"단팥빵 좋아해요."
세상에는 무수한 빵이 있다. 그중 내 마음을 훔친 1 pick은 누구인가? (빵순이의 마음은 때때로 갈대 같아서 순간순간 최애가 바뀌기도 하지만) 만약 빵에게 투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난 단팥빵에 투표할 것이다. 화려하고 최신 유행으로 무장한 빵들 사이에서 소박한 매력의 단팥빵. 한때 어려운 레시피와 비싼 재료의 수입빵이 맛있었다. 물론 이름도 외우기 힘든 그 빵들은 지금도 무척 맛있다. 자주 먹다 보니, 그 맛에 익숙해진 빵들도 생겼다. 그러나 그 모든 빵들은 단팥빵을 이길 순 없었다. 단팥빵은 저렴하고 달콤하고 동그랗고 따듯했다. 달콤한 팥은 인내와 노력의 맛이기에 정말 특별한 맛이었다.
아이가 언어재활수업에 들어가서야 점심 먹을 짬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밥먹기엔 다소 짧은 시간인 40분인지라, 아이와 멀리 떨어져 식당을 오고 가기엔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그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러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게 전부였다. 주로 금방 삼킬 수 있는 먹을거리로 빈속을 채워야만 했다. 때때로 독한 아메리카노는 속을 쓰리게도 하니, <금방 먹고 배부른 따듯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대부분 빵이었고, 그중 팥이 들어간 빵을 제일 좋아했다. 팥소는 긴 시간 팥을 쑤어 노력을 들여 만든 맛이라, 강렬한 단맛은 아니지만 달콤 쌈싸름한 특유의 맛이 있어, 베어 물면 금세 흡족해지곤 했다. 기다림을 닮은 팥소는 참으로 달았고 닮았다. 마음을 사르르 덥혀준 보드라운 달콤함은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단팥빵, 앙버터를 만나다.
"팥 좋아하세요?"
"아뇨, 전 팥 싫어합니다."
자신이 버터프레첼인 줄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외모도 늘 단정하게 가꾸고, 부유하고 우아한 삶을 꿈꾸고 있었다. 팥을 싫어하니 앙버터의 팥을 걷어내고 팥 없는 앙버터를 먹는다며 그는 조용히 웃었다. 자신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쑥도 싫고 팥도 싫다며. 그래서 그때 지겹게 먹던 맛은 입에 대지 않는다고. 그래서 어떤 날은 버터가 두툼하게 올라간 프레첼을 20분 넘는 거리를 차로 달려가 4-5개씩 사서 먹었다고 한다. 절약을 늘 강조하던 할머니 때문에 겨울은 늘 춥게살아서, 우리 집에 오면 따듯한 바닥의 온도에 감탄을 하곤 했다. 그는 먹는 시간이 아까워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야근을 해서라도 하루의 일은 그날 마무리한다. 어른을 모시고 조언을 듣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을 곁에 둔다. 할머니의 삶은 그에게 고스란히 묻어났다. 싫어하던 촌스러운 “팥”은 사실 그의 장점이었던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화려한 그의 외모를 보고 앙버터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우아한 팥 없는 앙버터이길 꿈꾼다. 그는 모른다. 수더분한 팥의 매력에 설레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보면 자신이 단팥빵 같은 사람이란 걸 그는 알까.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 주인공은 "맛있는 빵을 한입 베어 물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린다"고 했다. 단팥빵은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달콤한 위로이자 온기였다. 보드랗고 따듯한 팥이 마음을 채우는 그 순간, 더이상 외롭지 않았다. 단팥빵을 먹는 동안 난 오롯이 빵과 팥의 맛을 느끼며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표지출처: https://pin.it/198ZzIj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