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며 밥을 먹고, 길을 걷는다. 같이 마실 커피를 내리거나 주문한다.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전달된다. 말이 새어나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떠오르면 망설임 없이 연락하고, 당장 답장이 없어도 화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친하다는 사람은 이러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어릴 적 내성적이었던 나는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불편했다. 손과 마음은 떨리고, 밥은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만난 사람과도 십 년을 함께한 사람처럼 대화한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먼저 표현하여 친근함을 전하고, 상대방이 다가와 주기를 바란다. 물론 가끔은 어릴 적 내향성이 여전히 드러날 때도 있다. 조용히 앉아 글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나,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이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사람이 한 가지 양상만 보인다면 그것 또한 재미없지 않을까.
"엄마는 아는 사람이 몇 명이에요?"
"글쎄, 다 세어본 건 아닌데. 왜?"
아이의 평범한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누구와 정말 친한 사이일까? 친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대체 어느 정도의 사람을 친하다고 말해야 할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나와 맞거나 맞지 않거나'
직장 생활 초창기에는 단순히 'OX'로 사람을 구분했다.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사람에겐 나와 잘 맞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런 구분을 남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불편한 존재일 수 있으니. 또한 내 생각이 늘 정답은 아니므로, 절대 오만해져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 덕분일까. 내가 친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었다. 감정 표현도 줄었다. 요즘 말로 하면 조금 '시크'해졌다고 할까. 물론 친하지 않다고 해서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만 직장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런 구분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면 관계는 더욱 편안해진다. 가끔 내 언행의 적절함이 궁금해 책을 찾아본 적도 있지만, 결국 얻은 건 '그리 틀리지 않은 방법'이라는 답이다.
이런 마음으로 내 마음속에는 여러 개의 방이 생겨났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 방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들어온다. 이는 우선순위가 아니라 단순한 유형의 구분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를 둔다. 그들과의 관계를 무난하게 유지하면서도 나의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을 끊임없이 조정한다. 그들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교정하며, 그들에게서 배울 점을 찾아 내 안에 담는다.
만약 그들에게서 바람직하지 않은 점을 발견한다면, 상대를 탓하기보다는 그것을 나를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다. 만약 그와 같은 단점이 내게도 있다면 과감히 버리려 노력한다.
만남은 소비일까?
이 말에 단호히 반대한다. 글을 쓰고 나서 달라진 점은, 모든 이의 말과 행동을 귀담아듣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와 내 글을 성장시키는 촉매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 세 명과 함께한 시간. 같은 공간에서 1년을 함께 근무했다. 그동안 나눈 대화는 짧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서로에게 흐르고 있었다. 드러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오늘도 말을 아끼며 마음을 전한다. 아주 짧게.
'많이 좋아합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