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화는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
텔레비전은 항상 그랬다. 나는 그 안에 갇혀 있었다. 바보상자 속에서 끊임없이 성숙한 모습을 요구받으며. 온갖 규범, 이상적인 삶의 잣대들이 내게 쏟아졌다. 성숙하라, 똑똑하라, 아름다워라. 그 말들에 짓눌려 나는 마치 내 존재를 숨기고 살아가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늘 지나치던 동네 상점의 유리창에 붙어 있는 글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성숙하지 않은 바보들의 모임, 가입 환영.” 처음엔 실소가 나왔다. 성숙하지 않은 바보라니. 어쩌면 나 같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불쾌했다. 나는 왜 ‘성숙하지 않은 바보’에 분류되어야 하는가?
그날 밤, 모임의 광고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화면 속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돈이 없다고 고백하고, 실패와 외로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가 평생 숨겨왔던, 혹은 감추고 싶었던 모습을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환호받고 있었다.
나는 채널을 돌리려다 손이 멈췄다. 그들은 내가 평생 기피했던 모습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는 오랫동안 불편함과 경멸을 느꼈다. 그들이 부끄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화면 속의 그들은 오히려 환호를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리창에 붙은 글귀가 나를 초대하고 있었다. “가입 환영.”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문을 두드렸다.
모임의 첫날, 나는 긴장했다. 그들은 나를 반겼지만, 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늘 숨겨왔던 모습들, 나조차 인정하지 못했던 나의 일부를 이야기하는것은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모임의 사람들은 내가 침묵할 때도 배려해 주었고, 내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솔직했다.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이 뭔지 알아요? 친구한테 돈 빌려준 거. 아직도 못 받았어요.”
“저요? 뭐, 세 번 차였죠. 다 같은 이유로요. ‘매력이 없다’더라고요.”
‘아니 왜 세 번이나 차여? 그러고도 웃어?’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속에는 날것의 진실이 있었다. 어쩌면 나 자신도 인정하기 어려운, 그들이 웃어넘긴 그 진실들.
몇 주가 지나자, 나는 그들 사이에서 점점 편안함을 느꼈다. 나의 치부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떨리는 목소리로, 어색한 미소와 함께. 하지만 그들은 내게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어주었다.
모임은 해방에 가까웠다. 치부조차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깨달음. 바보상자 속의 세상은 더 이상 나를 가두지 못한다. 대신 나는 진짜 바보들, 성숙하지 않은 바보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제는 내가 그 모임의 유리창에 붙일 새로운 문구를 고민 중이다.
“당신의 치부를 환영합니다.”
텔레비전은 늘 나를 압도했다. 그것은 단순한 화면 이상의 것이었다. 세상은 그것을 통해 나에게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그른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 설교했다. 나는 마치 그 거대한 문화적 기준 속에 갇힌 기계 부품처럼 느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 문화는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