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
내면아이라고 불리는
그 아이가,
가장 아팠고,
상처가 깊었고,
슬펐던 기억은
반에서 1등수 내려가고,
전교 등수 11등 내려갔던 것을
아빠에게 말했던,
어느 화창한 주말에
아빠가 날 쳐다보지도 않고
건넸던 한 마디를 들었을 때였다.
"쯧쯧쯧, 그것도 점수라고...."
그때 내 등수는
전교 23등에서
전교 34등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5남매중,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공부를 못했던 형을 대학 보내느라,
고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
공부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고등 학교 졸업 이후,
농사일도 돕지 않고,
오로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골방에 들어앉아
공부에만 매진했다.
농사일을 돕지 않고 방에 들어앉아
공부만 하는 아버지를 보며
"밥만 축내는 버러지 같은 XX"라는 말을
할머니(자신의 엄마)에게 들으며
이를 악물고 공부한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을 떠나며,
두 번 다시 부모집에 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물론, 그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고,
우린 할아버지댁에 자주 갔다.)
아버지에게 공부는
그런 것이었다.
자식인 나를 미워해서,
상처주려고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공부라는 것 자체가,
아버지에겐 생존 수단이었고,
그것이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에,
성적과 공부는 아버지에게
매우 예민한거였다.
글을 적는 지금 이 순간은
아버지의 성장배경을 비롯한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어린 시절엔,
아니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난 이해는 커녕,
아버지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었다.
내가 내면의 아이를 만나,
가장 큰 상처를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떠올렸을 그때,
나의 아버지는 이미,
여러 해동안,
명절때마다, 술 기운을 빌어,
나에게 여러 번 사과를 하셨었다.
때로는 직접,
때로는 돌려 돌려.
그런데 나는,
단 1그램도, 상처의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가장 아팠던 그때를 떠올리며
아파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상처의 치유는,
상대의 사과나 인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상처가 치유되도록
내가 허락해야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상처를 준 이를 용서하기로
결심해야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잘못하고,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적반하장격으로
뻔뻔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수십년 인생을 돌이켜보면
십중팔구는 그렇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원인제공자가
사과하고 인정하면
내 상처가 치유될거라 생각하고,
그에게 인정과 사과를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내가 내면의 아이를 만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내게
여러 해 명절 때마다
여러 방식으로 돌려 돌려
사과를 하셨는데
난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
사과는 그 당시에
받아야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미 늦은 사과는
필요없다고 생각할 만큼
상처가 크고,
분노가 깊었으니까...
세상에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나다보니,
그들이 그렇게 행동해서
내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은 것 같지만,
아니었다.
그들에게 분노를 품고,
나 스스로 상처치유를 거부하며,
모든 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았다.
그래서,
난 다음 단계로
이동해야 했다.
내 상처는
내가 치유하기로
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다시 나는,
상처 치유의 여정을 떠나야했고,
그 주체는 오로지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